조선일보 헌정 스샷



인천에 사는 한 직장인이 저에게 이메일로 보내주신 '뉴스룸'이라는 미국 드라마 스크린샷입니다. 어떤 사람이 총격을 당했는데 라디오 방송에서 사망했다고 오보를 내자 지상파 방송도 모두 받아썼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 제대로 된 방송은 확실히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는 내지 않겠다고 하며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진상이 밝혀졌습니다. 병원에 확인해보니 당사자는 수술 준비중이었다는 내용입니다. 


조선일보에 헌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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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민의 제멋대로 성명] MBC 출연을 거부하며

아래 글은 며칠전 <미디어오늘> 인터넷판에 게재된 내용입니다만, 금일(7월 18일) 소셜테이너의 MBC출연거부 선언 움직임에 발맞춰 일부 내용을 보완해 블로그에 재게재합니다.

요즘 엉뚱한 이유로 안도하고 있다. 주요 방송 3사 가운데 MBC 고정 출연만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의 주 수입은 방송사 고정 출연료다.) 요청이 와도 응할 생각이 없다. 오늘(7월 18일)부로 결정했다. ‘사회쟁점이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사안에 대해  특정 단체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지지 또는 반대하는 행위를 한 사람에 대해 고정출연을 제한한다’는 MBC ‘공정성 살리기’ 내규 때문이다. 이는 방송사내는 물론, 외부에 나가 한 발언과 행동마저 MBC에 제약받는다는 규칙이다.

게다가 ‘소급’ 적용까지 한단다. 그 추상같은 엄명이 발효되는 7월 1일 이후에 동태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이전에 했던 행각마저 ‘편향됨’이 있는지 따지겠다는 것이다. 입만 열면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다시피 한 MBC의 모 고정 출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냥 그만두라”고. “초헌법적인 발상의, 상식 밖 MBC 수뇌부와 얼굴 마주하는 것부터가 당장 고역일 것이고, 나아가 시시때때로 자기검열에 시달려야 하는 참담함을 감당해야 하는데 정신건강이 온전하겠냐”고 부연하며 말이다.

이와 관련해 많은 누리꾼은 최근 소셜테이너로서 각종 이슈에 선명한 자기주장을 펴는 방송인 김제동, 배우 김여진 씨가 ‘위험’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들의 정파색 없는 사회적 약자 옹호도 문제시될 수 있다며 말이다. 사실 김미화 씨도 그런 이유로 사퇴 압박을 받고 물러난 것 아닌가.

그러고 보면 삭발까지 감행하며 저항한 김흥국 씨는 사실 김미화 씨에 비해 정도가 지나쳐 하차한 경우다. 한나라당 선거운동원 활동 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은 잣대로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선거운동을 벌인 ‘놀러와’ MC 김원희 씨, '댄싱위드더스타' MC 이덕화 씨, ‘배한성 배칠수의 고전열전’ MC 배한성 씨도 물러나야 마땅한 것 아닌가. ‘적용시효’가 따로 없다면 말이다.
    
게다가 ‘MB 지지’ 연예인이 어디 이 세 사람뿐인가. 공개적으로 이름을 건 것으로 보도된 김건모 김민종 김재원 박선영 변우민 성현아 신동엽 안재욱 안지환 유진 윤다훈 윤형주 이경규 이덕화 이순재 이지훈 이창훈 이훈 이휘재 전혜빈 정선경 차태현 최불암 씨 역시 드라마 예능 출연에조차 제약을 받아야 한다. 그런 저런 전력을 다 따지고 문제 삼아 정리한다면, MBC는 ‘위대한 탄생'의 우승자 백청강 씨 독무대가 될 것이 확실하다.

이런 식의 마구잡이식 ‘공정성 구현’으로 MBC가 얻을 게 무엇일까. 게다가 이런 룰을 도입하는 배경이 순수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얼마 전 “우리 사장님이 KBS 사장님보다 더 바보에요”라고 외부 행사에서 발언한 자사 PD를 구실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상 방송 출연 정지는 병역기피나 사기 및 도박, 마약 및 대마초 사범이 당할 조치다. 이런 사람과,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이가 같다는 MBC의 인식은 논리를 떠나 합리가 아니다.

통상 인식되는 ‘공정’은 기회의 균등을 말한다. 김미화를 날렸으니 김흥국도 없애는 게 아니라 김미화가 나오면 김흥국도 나오는 게 공정이란 이야기다. 모든 것을 좌우양단으로만 규정하는 시각은 시대착오적이다.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의 보편화로 소통의 장이 확대되는 흐름을 역행할 수 없다. 이런 원칙과 이유로 MBC의 ‘대외활동규칙’은 하루 속히 폐기돼야 할 것이다. 사실 이건 해외토픽에 나올 사안이다. 상식의 정상화 이전에 나는 자기검열하며 못 할 말 하고, 해선 안 될 말 할까봐 본사는 물론, 19개 지방 계열사와 9개 자회사 프로그램에 참여 않겠다. 이상!

사진이 불편한 분들도 있을 줄 압니다.
탁현민 교수의 '삼보일퍽' 투쟁에 동참하려는 뜻입니다.
깊은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언론자유를 파괴하는 이들 모두를 향한 제 성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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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 까’ 기자가 진중권에게 배워야 할 점

문화평론가 진중권 씨가 심형래 감독의 신작 '라스트 갓 파더'에 대해 혹평했다. ‘디 워’ 논란 때와 비슷해 진중권 씨가 공격받는 양상이다. 그러나 비평의 자유는 보장돼야 마땅하다. 따라서 심형래 감독 작품에 대한 진중권 씨의 비평은 매도할 일이 아니다. 물론 이런 진중권 씨의 비평에 대해 반대 입장에 선 이들의 의견 표출 역시 시도자체를 금지할 수 없다. 당연히 오늘 토론의 대상인 TV 프로그램 특히 ‘무한도전’에 대한 비평 역시 제한을 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평가에도 논리라는 게 요구된다. 진중권 씨가 심형래 감독이 갖춘 영화 제작 능력, 외국 시장에서의 한국영화 활로 개척 성과, 투자 유치 실적이 있어야만 가타부타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이다. 영화 평론을 소수의 제작 경험자만의 전유물로 만들어 버리는 우(愚)를 범하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무한도전’에 대해 방송종료가 무섭게 악평을 올려 상당수 누리꾼의 원성을 사는 인터넷신문 <스포츠투데이> 최준용 기자의 ‘악평’과 대조해봤다. 독하기로 그의 비판이 결코 뒤지지 않는다. 바이라인에 그의 이름이 박힌 기사의 제목이다.

“비판할게 없는 2등 '무도', 6주 연속 '스타킹'에 '참패'”,  “무도' 외모비하·사생활 들추기·저속한 표현··심각 수준”, “'무도' 안전벨트 미착용 도로교통법 위반··'백해무익'”, “'무도' 달력특집, 3주째 우려먹기··'진부+식상+짜증'”, “위기의 '무도', 비슷한 패턴의 반복··시청률 반 토막↓”, “'무한도전' 텔레파시 특집? 소통불능 '그들만의 리그'”, “'무도' 연극도전?, '재미+감동 실종' 두 마리 토끼 다 놓쳐”, “'무도' 지상파에서 고스톱? 사행성 논란..'시청자 뿔났다'”, “'무도' 빙고특집, 질 낮은 몸 개그 향연? 진부한 포맷 '식상'”등의 기사가 그랬다.

이 제목대로라면 ‘무한도전’은 한국방송계의 암적 존재이다. 하지만 최준용 기자가 제시한 근거는 소폭 하락한 또는 경쟁 프로그램과 미미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시청률과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비판성 게시물 그 밑바탕에 흐르는 본인의 인상비평이 사실상 전부이다. (토요일 오후에 가정에서 ‘무한도전’을 본방 사수하는 주시청층 젊은이가 몇이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은 최준용 기자에게 없는 듯하다.) 한마디로 의도와 감정을 저간에 깐 것이 명징하다 하겠다.

진중권 씨에게도 그런 정서가 느껴진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있다. ‘심형래 감독이 개그맨 출신이라서 폄하하는 것 아닌가’하는 감회이다. 맞는 말일까. 많은 이들이 그런 인식을 하는 동안, 나는 진중권 씨의 뼛속까지 채워진 ‘안티 애국주의’에 주목했다. 이는 “심형래 감독이 수준 이하의 영화를 만들어 놓고는 ‘한국인이 만들어 세계시장에 진출했다’는 식의 마케팅으로 손님을 끌려 한다”는 비판이다. 기실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비 횡령 논란, 2PM 박재범 퇴출 시비 때에도 그의 주공격 대상은 ‘애국주의’였다. 이성과 논리를 짓뭉개는, 역사가 증명한 초월적 광기 바로 그것이다.

이에 비해 최준용 기자의 일방적 일관적 ‘무한도전 까기’엔 어떤 논리가 흐르고 있나. ‘식상하다’는 투의 실체 없는 깎아내리기는 배제하고 논리로 볼 만한 부분만 짚어봤다. 그러면 “왜 교통법규를 어기느냐”, “왜 고스톱을 치느냐” “왜 질 낮은 몸 개그를 하느냐” 이런 지적 정도가 채에 걸린다. 이런 것을 방송에서 배제해야 하는 논거로는 각각 안전 불감증 및 도로교통법․방송심의규정 위반, 방송의 품격 저하, 청소년 모방 우려 등을 꼽았다. 숱한 문화 콘텐츠 비평을 봐 왔지만 이런 일차원적 트집은 전례가 없다. 선수들끼리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 보는 부류이다.

최준용 기자를 고용하고 있으며 그 기자의 기사를 검증해 최종 출고를 결정하는 언론사 <스포츠투데이>의 모체 <아시아경제>에 이목을 돌려본다. 나는 이 매체가 최준용발 ‘무도까’(‘무한도전’ 까기)를 은근히 즐기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는다. 근거라 하기엔 남우세스럽고 여하간 정황을 보면 그렇다.

대표적으로 ‘무도까’ 확대 재생산 의혹이다. 지난해 11월 6일 토요일 ‘무한도전’ 방송 직후인 8시 5분과 8시 9분, 이튿날 오전 7시 50분에 게재된 ‘무한도전’ 멤버들의 안전벨트 미착용 시비 기사를 보자. 문장 몇 군데 첨삭만 있었을 뿐 기사 내용은 거의 판박이이다. 언론사 차원에서 어뷰징했다는 설명이다. 이는 대동소이한 기사들을 몇 시간 간격으로 연거푸 올리는 것을 말한다.

네이버 1기 서비스자문위원을 지낸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포털, 언론사, 블로그 등등 여러 영역에서 데이터베이스나 트래픽 상 불필요한 부하를 만들어내며 검색하는 누리꾼의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사회적 해악”이라고 지탄한 바 있다. 예능에까지 들이대는 고루한 ‘도덕의 잣대’로부터 이 언론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왜 이럴까. 기사의 품격과 교양 여부는 일단 차치한 듯하다. ‘논란’이 곧 ‘클릭수’로 순치되니 말이다. 클릭 수는 해당 인터넷언론에게 광고 물량 확보와 직결되다보니 다다익선이다. 제 아무리 말이 많아도 클릭수로 증명되는 효과에 마다할 장사가 없는 법이다. 언론사만 덕 보는 게 아니다. ‘재주’넘는 최준용 기자도 이참에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 ‘자기 콘셉트’를 확실하게 정립해 나가는 효과가 있다.

(최준용 기자의 기사를 검색하며 그의 놀라운 에너지에 다시 한 번 놀랐다. 2010년 12월 27일부터 이듬해 1월 2일 한 주간 동안 기명기사만 무려 123개를 토해냈다. 산술적으로 하루 평균 17건 넘는 기사를 작성했다는 것이다. 특히 TV리뷰 기사가 주류를 이루던 1월 1~2일 주말에는 ‘취재 대상 프로그램’이 ‘무한도전’을 포함, 무려 12개이었다. 편성 시간대가 중첩되는 프로그램도 있어 이를 다시보기 서비스를 통해 시청했다고 치더라도 대단한 시청욕이 아닐 수 없다. 그 성실과 열정에 경탄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기사를 써놓고 최준용 기자의 이름을 빌려 올리기만 한 게 아니라면.)

그러나 기자는 기사로 말한다. 행간과 글 전체의 맥락에 진정성이 결여됐다면 음험한 의도가 서려 있다면 이는 기사가 아니라 사기이다. ‘무한도전’이 1월 1일 방송분을 '2010 연말정산 뒤끝공제'로 꾸몄다. 현장 참석자 전언에 따르면 이 자리에 최준용 기자도 초청 대상이었단다. 하지만 끝내 스튜디오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출연 여부야 본인의 선택이다.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보장된 발언권을 마다한 최준용 기자는 방송 이튿날  “비판할게 없는 2등 '무한도전'”이라며 조롱하더니 “6주 연속 '스타킹'에 '참패'”당했다고 강조했다. ‘참패’했다는 시청률도 따지고 보면 3.6% 정도. 노골적인 침 뱉기이다. 사정이 여기에 이르다보니 “도대체 저 기자, ‘무한도전’에 어떤 사적 감정이 있나”라는 의문은 대세가 돼 버렸다. 혹 ‘잘 나가는 연예 프로그램의 저격수’, 이게 최준용 기자가 바라는 이미지 메이킹의 종착점일까. 충고하건대 이런 꼬리표가 기자에게는 질곡(桎梏)이 될 뿐이다.

‘인상비평’은 최준용 기자만의 것이 아니다. 나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커밍아웃한다. 나는 ‘무도 빠’이다. 솔직히 고백하지만 사실 최준용 기자만큼의 ‘탐구생활’을 성실히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접하는 와중에, 심지어 최준용 기자의 악평의 행간 속에서조차 ‘무한도전’의 끊임없는 실험의식과 도전정신을 목도한다. 대표적으로 한 해 전 이맘 때, 탈북 그리고 일본 소녀 여복서 간 눈물의 권투 경기, 최종 승부 결과를 보여주지 않고 엔딩 크레디트가 흐를 때 나는 ‘동시대 최고의 버라이어티 예능의 완성’을 확인했다.

누구를 사수로 삼아 기자 교육을 받았는지 알 수 없으나 “내가 쓰면 곧 여론이 된다”는 특권의식이 단 1%로 개입된 기사를 썼다면 그 즈음 긴 호흡으로 자신의 ‘골로 가던’ 기사 방향을 되돌아보길 바란다. 그리고 TV수상기 밖 ‘무한도전’ 앞에 드리워진 먹구름 또한 직시하기 바란다.

터무니없는 이유로 MBC 연예대상에서 ‘무한도전’은 찬밥신세가 되고, 나아가 폐지 소문에까지 휘말려 있는 상황이다. ‘정권이 불편해한다’는 신호가 여러 군데에서 감지되고 있는 가운데 ‘무한도전’이 일부 친정부 행동집단의 표적이 돼 버린 탓일까. 폭군 시대에도 저잣거리 익살꾼의 권력 조롱을 내버려 두어 전례가 없는 터라 ‘시대착오’라는 표현조차 적절치 않다.

‘비평하지 말라’는 말로 오독할까 염려된다. 비평다운 비평을 쓰라는 게 본의이다. 그만큼 ‘무한도전’은 존립할 가치가 있으며 세치 혀 놀림을 버거워 할 만큼 엄중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설명이다. 몰 가치한 흔들기로 행여 '무한도전'이 휘청 이는 날이 오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상당수 시청자의 무한도전이 시작될 것이다. 아직은 “‘무한도전’ 뒤에 정부 전복세력이 있다” 또는 “최준용 뒤에 정권이 있다”는 말, 모두 터무니없다고 믿고 싶다.

결론이다. ‘무한도전’이 없어지면 최준용 기자는 토요일 밤 오징어를 대신 씹을 생각인가. 본인의 불평불만 → 시청률 언급 → 안티 의견 전개로 정형화된 본인의 ‘무한도전’ 때리기 논법의 식상함부터 혁신하라.

(첨언 : 정 ‘식상하다’, ‘저질 몸 개그 그만하라’, ‘애들 따라할까 염려된다’는 기사를 쓰고 싶다면, ‘무한도전’ 대신 청와대나 국회 쪽에서 찾아보라. 어려운 일이 아니다. TV채널을 MBC에서 국회방송으로 돌리기만 하면 된다. 장담컨대 하루 출고량이 두 배는 늘 것이다.)

/ 인터넷 '미디어오늘' 2010년 1월 3일 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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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기자의 사회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왜 허구헌 날 이명박 대통령을 욕하느냐.” 잘 하는 대통령, 발목 잡는다는 입장이지요. 이런 경우는 세상사에 대해 담 쌓은 경우이거나 이명박 대통령 본인과 일가친척 아니고서는 찾기 힘들기에 아주 희귀합니다. 요즘은 MB 측근들조차 대통령 비난에 대해 항변은커녕, 꼭 다문 입에서 미동도 않습니다. 기실 타당한 비난,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긴 제가 토해내는 대부분의 시국인식은 ‘MB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됩니다. 사적 글쓰기로부터 공적 방송매체에 이르기까지 일관됩니다. 그러다보니 여러 군데에서 잘리는 비운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기(銳氣)는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저의 답은 이러합니다. “평론가로 자기를 알리고 다니면서 어찌 이 기막힌 시대에 대해 침묵할 수  있는가”입니다. 아는 사람은 압니다. 민주주의 위협, 정치실종, 서민경제 악화, 환경파괴, 남북관계 후퇴, 외교력 감퇴의 뿌리는 MB 이 사람에게서 시원(始原)된다는 것을. 반대파를 숙청하는 걸로 모자라 기소, 밥줄 끊기 심지어 뒷조사로 짓밟았습니다. 야당을 투명인간으로, 여당을 로봇으로 보고 국회를 파행으로 몰아갔습니다. 말로는 친서민을 외치면서 부자감세 옹호에다 복지예산 삭감이라는 이중성을 스스럼없이 나타냈습니다. 쓰레기더미인 강바닥을 파고, 물길을 막아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걸로 모자라, 골프장, 호텔을 파구 짓고는 ‘이거 다 하면 4대강이 살아난다’는 상식 밖의 논리를 강요했습니다. 북한을 ‘깡패’라고 낙인 찍어놓고도 이들이 쏜 포탄이 국민 안방에 날아오는 과정에서 아무 방어막을 두지 않았습니다. 지난 10년 동안의 정부가 북중미 3자와의 불가근불가원 원칙으로 조성한 동북아시아에서의 주도권을 스스로 반납하며 미국 뒤에 붙어서 “형님만 믿겠습니다”라며 안깁니다. 북한 포탄 공격에 굴욕적 협상으로 국내 전 산업의 붕괴를 부를 굴욕적 FTA협상을 미국과 체결합니다. 단선적 사고를 배격하는 지성인 상당수도 인정합니다. “이게 다 MB 때문이다”라는.

(물론 MB가 ‘끝나면’ 모든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 파행 이전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도덕성이야 어떻든 부자 만들어준다니 밀어주자’던 눈 먼 욕망의 민심이 맹성(猛省)하지 않으면, 또 MB 위에 군림하는 자본 권력과 기득권 세력의 지배구조가 개선되지 않으면, 제 2의 MB, 제 3의 MB 출현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MB를 비판해야 한다’는 저의 인식에는 5년간 모든 조사에서 ‘영향력 1위 언론인 손석희(성신여대 교수)’가 꼽히는 현실이 바탕에 있습니다. TV 라디오에서 시사프로그램 진행하면 다 얻게 되는 영예일까요? 또 특유의 핸섬한 외모 때문일까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 그는 MBC 방송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주동자로 묶여 수의를 입고 수갑 찬 과거가 있습니다. 이 때 궤적을 통해 ‘불의에는 참지 않는 저널리스트’로서 국민에게 각인된 것입니다. 마땅한 평가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손석희의 영예를 쫓자’는 투로 해석하지는 마십시오. 우울한 환경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언론인, 시대는 원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저는 그래서 ‘지금이 언론인으로서의 위상을 얻을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또 이런 폭압적이고 야만적인 정권이 나오겠습니까? 게다가 이 정권은 2년여 정도에 불과한 시한부입니다. 역사책을 한두 권만 읽어도 2년 후에 누가 대권을 잡더라도 ‘MB시대에 대한 반성’에 기초해 있을 것이고, 이 시기에 부당한 탄압받은 이들이 복권될 것이 분명하다는 관점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저는 목도 또 겨냥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여기서 멈추면 어줍지 않은 제 자랑이 되겠지요? 이는 비정규 일용직으로서 무명의 평론가인 저만도 못한 이른바 메이저 언론사 소속원의 파이팅을 요구하기 위한 내러티브였습니다.

MB의 이 부당한 권력남용의 핵심적 지지 세력은 바로 언론입니다. 통치자 MB가 정치적 위기를 만날라치면 “MB, 보고받고 격노” 이런 헤드라인으로 책임을 벗겨줍니다. 그러면서 대책 수립 과정을 전할라 치면 “MB, 정면돌파 결심” 또는 “MB 신중 또 신중” 이런 표현을 써가며 권위를 실어줍니다. MB의 오판, 실책에 대한 시시비비는 온 데 간 데 없습니다. 청와대가 각본 연출한 서민 행보 이벤트에는 “눈물 보인 MB"의 타이틀로 인간미를 덧칠합니다.

최근 예산안 관련한 국회 파행에서 보지요. 힘의 논리를 앞세운 여당의 폭거가 이어질 때면, 처음엔 ‘국회 폭력사태 또 재발’ 이러면서 충돌을 빚은 여야를 싸잡아 비난합니다. 양비론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양비론은 균형감이 있어 보입니다. 또 무난합니다. 그러나 시시비비를 가려할 언론의 책무는 실종됩니다. 무차별적 양비론은 결국 강자 편이라고 하지요? 실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국민은 바보가 아닙니다. 이런 식의 본질 흐리기도 하루 이틀입니다. 이때를 위한 언론의 ‘다음 스텝’이 없는 게 아닙니다. MB 일당의 비행(非行)이 도를 넘어서면 그때는 축소 보도하거나 아예 외면함으로써 엄호합니다.

이 쯤 되면 여기에 침묵하거나 동조한 자들은 기자(記者)가 아니라 ‘기만’, ‘사기’ 할 때 는 쓰는 ‘기(欺)’에, ‘놈’을 뜻하는 ‘자(者)’를 쓴 기자(欺者)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닙니다.

이들에게 귀청이 상하도록 전하고 싶습니다. “회개하라, 정권종말이 가까웠느니라”라고요. 따져봅시다. 다음 정권 대에도 이른바 저널리스트의 위상이 과거와 같을까요? 민주주의의 위기 때 이기적 고려 없이 곧은 말을 했던 언론인이 극소수였던 반면, 외압 또는 내압 아니면 자기검열로 바른 소리를 회피했던 이들이 다수였던 현실을 국민은 똑똑히 기억합니다. 독립된 ‘4부’로써의 언론은 없고, 저널리스트를 하나의 생존수단 나아가 영달의 도구로 삼는 이들만 만개한 상황에서 누가 기자, PD, 아나운서, 카메라, 기술인의 귀를 기울일까요?

언론인 여러분, 지금이라도 상식과 양심이 부르는 ‘야성’을 회복해주십시오. 사회 각 주체가 동등한 위상에 서서 민주적이고 자유롭게 토론하고 의사 결정할 수 있는 구조라면 중립, 균형, 불편부당의 원리는 꼭 필요합니다. 지금이 그때인가요? 과장 하나 안 보태고 강자의 독식은 폭압적 양상을 띄고 있고 약자는 신음조차 못 내며 고사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김두식 교수는 저서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애매하면 약자 편을 들라”고 했습니다. 언론인 여러분이 유념할 말입니다.

지성의 상징 리영희 교수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이 생전 문학평론가 임헌영 씨와 가진 ‘대화’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거짓을 가지고 마치 진실인양 둔갑시켜야 하는 언론인의 기능과 처지에 대해서 나는 환멸을 느꼈어. 그런 정신적 심적 갈등과 고통이 거의 폭발 지경에 이를 무렵, 조선일보와 정부가 나에게 사표를 내기를 강요한 거요. 나는 올때가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사표를 내고 나왔어. 이것을 계기로 다시는 동포에게 사기를 치고 기만하면서 불성실한 신문인으로 먹고사는 직업일랑 청산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아예 육체노동자가 되겠다고 생각을 했어." 평생 해 보지 못한 육체노동 즉 책 외판은 얼마 못 했지만, 언론계로 돌아왔을 때 리영희 선생은 바른 말 족족하며 저널리스트의 본령에 충실했습니다. 기자하다가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바른 말 하겠다는 기개가 있는 경우가 지금 침묵하는 언론인만큼 있다면 시대가 이렇게 망가질까 하는 회한이 듭니다. 새해, 언론인의 자존심을 지킵시다. 다 술에 취해 바닥에 너부러져도 여러분만은 깨어 감시해야 합니다.

/ 월간 '복음과상황' 201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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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적중한 김구라의 예언 "용민아, 세상과 타협하라"


요즘 불거지는 'KBS 블랙리스트' 파문을 보며 김구라 씨의 '선견지명'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됩니다. 김구라 씨는 오락 프로그램을 통해 김제동 씨가 '좌파 논란'에 휘말릴 것을 풍자적으로 예견했었죠? [관련 동영상 시청하기]
 
저에 대해서도 이명박 정부 집권 초기인 2008년 3월에 자신의 책에다 "세상과 타협하라"며 조크 섞인 걱정을 했습니다. 당시 저는 KBS에서만 4개의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할 정도로 잘 나갔었죠.

기억을 좀 더 더듬어볼까요? 당시 KBS의 라디오 저녁 프로그램 고정 출연자였던 저와 관련해, 청취자들은 MC 김구라 씨로부터 이런 내용의 멘트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김용민 씨가 대선 끝나고 사석에서 이랬습니다. ‘형님, 저 이제 끝났어요’라고요.”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지 않은, 시사평론가 김용민 씨 나오셨습니다. (당신,) 왜 이렇게 대세에 역행해? 새 시대에 동참해야지!”

“오늘 김용민 씨가 양복을 입고 왔네요. 한나라당에 가서 구명 활동을 벌이고 오셨나 봐요.”
 
물론 저는 ‘이명박 이후’에 대한 고민을 김구라 씨에게 토로하거나 한나라당에 가서 구명 활동을 벌인 바 없습니다. 김구라 씨의 ‘구라’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구라 씨의 이런 '위험한 조크'는 당시만해도 스튜디오 안팎에서 유쾌하기만 했습니다. 엄혹한 현실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거죠. 저는 그 해 11월, 2개 남은 KBS프로그램에서 모두 하차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KBS 고정 출연 요청을 받아보지 못 하고 있습니다.

'인간 돗자리' '펠리칸 도사' 김구라 씨를 만나게 되면 '이명박 대통령의 앞날'에 대해서도 물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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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블랙리스트', 제가 공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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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낚이신 여러분께 우선 사과드립니다. 듣보 아니 특보 사장이 있는 동안 어차피 KBS에 출연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기에 호기 한 번 부려본 겁니다.

'갑'되신 김인규 사장님, '을'도 밟으면 꿈틀거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방송 연사들의 최대 거래처가 KBS이지만, 당신 치하에선 요청이 오더라도 출연할 뜻이 없음을 밝힙니다. 왜냐. 세상이 알고, 나도 알고, 당신도 알, 위 도표에 나온 '사유' 때문입니다.

기자로서의 자존심에 스스로 먹칠하는 정권 홍보방송, 열심히 하십시오. 저는 출연거부로써 '생각 바로 박힌 시사평론가'라는 이미지를 관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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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대학에 <조선일보> 50부 기증한 기업인

ⓒ 조선일보 사보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음.)

<조선일보 사보> 7월 2일자입니다. 대학생들이 <조선일보>를 안 읽고 '좌파신문'만 읽어 한 쪽 논리에 경도됐다는 생각입니다. 이같은 문제의식 속에 대학생의 균형잡힌 시각을 위해 <조선일보>를 읽게 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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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새노조 파업 지지연설문] 이명박은 곧 멸망한다


방금 엄경철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장님이 이곳 KBS 신관 계단 광장(KBS 새 노조가 본관 내 민주광장 진입을 차단당해서 부득이 모이는 장소)의 이름을 지어보자고 하셨는데 아이디어 하나 내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KBS 장악기도를 영구히 포기하라” 이런 의미의 ‘영포광장’ 어떨까요?

KBS동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명박 대통령 정부 들어 방송에서 자주 보기 듣기 힘든, 이 때문에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없는, 그러나 방송사 노조 파업 현장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그러니까 거룩한 현장만 골라 다니는 시사평론가 김용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를 ‘KBS 새 노조’라고 부릅니다. 어감 좋습니다. KBS에 새 바람을 몰고 올 노조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KBS 새 노조와 크게 대조되는 KBS 현 노조를 ‘KBS 헌 노조’라고 생각합니다. 헌 노조는 가라! 어용노조는 가라! 강동구로 가라!

여러분, KBS의 대표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TV쇼 진품명품’ 아닙니까? KBS의 모든 구성원을 상대로 진짜 언론인인지, 가짜 언론인인지 구분하는 그런 ‘진품명품’을 해 봤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다 진품 판정이 날 거라고 믿습니다. 반면 김인규 사장의 감정가는 최저가 2500 원, 많아도 6500 원에 불과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얼마나 고되십니까? 고된 것은 그런대로 넘길 수 있지만, 치사한 걸 보면 맥 빠지지요? 이해합니다. ‘하꼬방’만한 기업도 노조 깃발을 들면 인정하긴 싫어도 노조사무실 내 주고 임단협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김인규 사장은 안 합니다. 법원은 여러 판결을 통해 “사측은 성실교섭의 의무를 지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렇게 나오는 거, 불법입니다.

사실 지금 KBS 체제 자체가 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기가 보장된 사장을 무고하게 내쫓았습니다. 법원은 이걸 무효라고 못 박았습니다. 그렇다면 원상 복구해야지요. 그런데 무시해버립니다. 그래놓고 낙하산 사장을 내리 꽂습니다. 우리 방송법 44조는 KBS의 역할을 두고 “공정성과 공익성을 실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낙하산 사장은 대통령 선거 운동원 출신입니다. 대통령 선거 운동원 출신이 공정성을 구현할 수 있을까요? 공정성을 상실한 현 KBS뉴스가 증명합니다. “아니다”라고요.

노조와의 교섭은 물론 파업 집회 등도 막는 식의 부당노동행위를 합니다. 그러더니 지난 일요일에는 노조의 파업을 불법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법리적 해석을 해 보면 불법의 여지는 이명박 대통령의 양심만큼이나 없습니다. 불법으로 보일 뿐이겠지요. 그건 인상 비평 아닙니까? KBS는 자막에다 인상 비평을 띄우기도 하나요? 괴담이나 허위사실 유포하면 작살내겠다며 날이면 날마다 겁박하는 이 정권, 어째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용합니다. 바쁜가봐요. 민간인 사찰하느라.

KBS 새 노조의 합법파업이 불법파업이라고 하는 당신들, 불법 체제 속에서 근무하는 당신들, 불법근무부터 그치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에서 계신 청원경찰 여러분, 합법 파업하는 사람들에게 부당 노동행위하지 마시고, 불법 근무하는 저 사람들을 끌어내십시오.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연설의 제목을 “이명박은 곧 멸망한다”라고 잡았습니다. 이 내용은 제 블로그에도 그대로 게시될 것입니다. 오늘 KBS를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이명박 대통령입니다. 그걸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그런 이명박 대통령은 조만간 멸망합니다.

정치 공학적으로 보더라도,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임기 후에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후계자가 있습니까? 만수가 그걸 하겠습니까? 시중이가 하겠습니까? 아니면 동관이가 하겠습니까? 그래서일까요. YS처럼 ‘깜짝 놀랄 젊은 후보감’ 운운합니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표심은 ‘앞으로 이명박 대통령과 차별화하지 않고서는 미래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후계자가 없었으면 “왜 나에게는 이광재, 안희정 같은 사람이 없는가”라고 개드립, 아니 애드립을 칩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광재, 안희정 같은 사람이 당신하고 일하겠냐”고!

영포게이트 사건 보세요. 물론 민간인 사찰한 사람에 대해 엄중하게 법의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꼬리를 잘라요. 그래놓고는 “어설픈 것들이 까분다”는 식으로 짓밟습니다. 노무현 보세요. 비록 안희정 씨가 감옥 갈 거 다 갔지만, 정치적 부담을 지면서까지 안희정을 감쌌습니다. “그는 내 동업자”라며 말이죠.

정말 이광재, 안희정 같은 젊은 지도력을 원합니까? 이명박 대통령님, 여기 김인규 사장이 있습니다. 김인규 사장에게 줄 댄 사람들까지 묶어서 패키지로 데려가십시오.

이명박 대통령의 멸망을 예견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 국민들이 깨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팔 빠지도록 천안함 북풍을 불려고 했지요. 모든 언론이 장단 맞췄습니다. 그러나 우리 유권자들, ‘정권 심판’이라는 본심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러보면 이명박 대통령은 안 된 사람입니다. 학력수준 높은 사람이 투표하면 긴장하게 됩니다. 농촌보다 도시의 투표율이 높아지면 우울해집니다. 젊은 세대가 투표 안 하기를 바랍니다. 경제성장, 뉴타운 등 헛된 욕망을 부추겨야 희망이 있습니다. 이 이명박 대통령의 실체,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 관장도 불사할 것 같은 서포터스 ‘조중동’의 실체를 다수 민중은 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래서, 추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 기반이 없습니다. 그에게 들러붙는 이들 상당수는 기득권 추종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힘이 빠져나갈 경우에도 의리 지키며 충성할까요? 노무현 대통령은 철학이나 양심이란 게 있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영포빌딩, 영일빌딩 그리고 집 밖에요. 이것이 바로 이광재, 안희정이 ‘남의 떡’일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른바 ‘독재자의 딸’로 불리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집권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건 별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박근혜의 집권을 결사적으로 막을 파워풀한 리더가 이 대한민국에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이명박 대통령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표가 집권하는 꼴을 결코 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둘은 피터지게 싸우다가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을 겁니다.

일전에 MBC노조 파업에 가서도 한 얘기입니다. 친박 인사 한 분의 이야기를 지인을 통해 들었습니다. “진보 야당이 집권하면 이명박 대통령 세력은 아작 나겠지만, 박근혜가 집권하면 이명박 대통령 세력은 가루가 된다”고 말입니다. 이걸 이명박 대통령이 모르겠습니까?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시대를 끝장 낼 새 지도자가 너무 없다고 생각하시죠? 그러나 김종필 씨가 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선이면 딱 두 달이면 돼!”라고 했습니다. 노무현은 어땠습니까? 선거 승리 열 달 전에 반짝 ‘노풍’이 불었을 뿐, 그 이전에는 당선 가능성이 제로였습니다. 우리나라뿐입니까? 오바마는 당선 2년 전만해도 이른바 ‘듣보잡’이었습니다. 벼락스타를 기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지만, 대선까지는 2년 반이나 남았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이명박 대통령은 망할 것이고, 김인규 사장도 끝날 겁니다. 2년 반 뒤엔 차고 있는 완장 풀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이 정의롭고 사명감 넘치는 전도가 유망한 후배들을 피눈물 나게 했던 죄악을 반드시 심판받게 될 겁니다.

그러나 이건 명심하십시오. 누가 집권하더라도, KBS를 장악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을요.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제도나 법규 또한 정치 환경을 본다 하더라도 KBS가 BBC같은 독립된 공영방송 구조를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방송의 독립성을 지키는 유일한 지지대는 바로 여러분뿐입니다. 따라서 이 투쟁은 여러분이 KBS를 정년 은퇴하는 그날까지 전개해야 할 겁니다. 각오하셨죠? 왜 국민이 KBS에 몸담고 있는 여러분에게 뜨거운 시선을 보내겠습니까? 그런 사명을 수행해 줄 것을 바라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전개하는 이 투쟁이 김인규 사장을 당장 참회하게 만들 것이라 낙관하지 않습니다. 의미 없는 투쟁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투쟁은 결과보다는 투쟁 그 자체에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가슴에 새기십시오. 이명박 대통령을 상대로, 김인규 사장을 상대로만 투쟁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국민을 상대로, KBS가 제자리를 찾을 날, 보여줄 공정한 방송, 그 방송의 예고편을 보여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고 강고하게 이 대오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민주주의도 그렇지만 KBS에 있어서 언론자유는 달성할 가치가 아닙니다. 유지할 가치입니다. KBS 구성원은 몸담고 있는 회사가 현대사에 남긴 그릇된 족적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KBS는 한국전쟁 때, 대전으로 도망간 이승만의 ‘안심하라, 해주까지 진격하고 있다’는 대국민 사기극을 생중계한 죄가 있습니다. 그 방송 믿고 서울에 머무르다 영문도 모른 채, 죽고, 다치고, 헤어지고, 끌려간 사람이 한 두 명일까요?

KBS는 5.16 군사 쿠데타 세력에 의해 점령된 뒤, 혁명공약문을 전파에 실은, 군사정권 시대의 서막을 연 주인공으로서, 오점을 남겼습니다. 박정희 군사정권 때, 3선 개헌, 유신 개헌 홍보대사 역할을 하며 정권의 충직한 나팔수가 됐습니다.

KBS는 5공화국 시절에는 이른바 ‘땡전뉴스’로 스스로의 자존심을 짓밟았습니다.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돼 탑승자 269명 모두가 사망하던 날, 첫 뉴스로 전두환 대통령과 영부인 이순자 여사가 새마을 청소 지도했다는 소식을 내보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둘 누적돼 시청료 거부 운동이라는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보다 못한 KBS 구성원은 1990년대 초반 민주화운동을 통해 공영방송 바로 세우기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십 수 년 동안의 공정방송 투쟁을 통해 KBS를 가장 신뢰받는 언론으로 바로 세웠습니다. 국영방송인지 관영방송인지 공영방송인지 구분조차 못하던 KBS 인사들은 기둥 뒤로 혹은 유령이 돼 박물관으로 숨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 한 여름 납량특집 같은 일들이 벌어졌지요. 그 박물관에 갇혀 있는 유령들이, 기둥 뒤에 숨었던 자들이 다시 나타나 KBS를 집어 삼켰습니다. KBS는 선거 때 특정 정당 지지 입장조차 밝힌 바 없는 정관용을 내쫓고, 선거 때 한나라당 유세하러 나간 한 방송인을 끌어왔습니다. 이 방송인, “이제 여러분들이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 이제 그만 고생하셔도 됩니다” 이러며 2008년 총선 당시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 지원연설을 했지요. 그리고는 공정 공익을 주창하던 이병순 체제에서 KBS라디오 시사프로그램 MC를 했습니다. 여러분, 언제부터 KBS라디오 시사프로그램 MC하려면 한나라당 후보 선거운동을 해야 합니까?

여러분, 이명박 대통령이 멸망해서 김인규 사장이 KBS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투쟁 끝입니까? 물론 이렇게 광장에 나와서 ‘개고생’을 안 해도 되겠지요. 아닙니다. 언론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투쟁, 싸울 상대가 없으면 내 자신이 그 상대가 되는 투쟁,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도 감히 KBS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꿈 자체를 꾸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염려되십니까? 끝이 안 보여서요. 저 같은 일용직 출연자도 앞으로 최소 2년 반 동안 KBS 출연을 반납한 채 이 자리에 서서 거래처 사장님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물론 김미화 씨가 언급한대로 저도 블랙리스트 안에 이름이 있어서 어차피 '비방' 안 해도 출연 못 할 처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칠 수 없습니다. '저항하는 시사평론가'로서의 명성을 기회를 말입니다. 언제 다시 또 이런 기막힌 시대가 오겠습니까?

박정희, 전두환 시절처럼, 비판 언론인을 붙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밥줄 끊고 이러면서도 권력이 언제 그칠지 모르는 암흑기는 아니잖습니까?  2년 반이면 더 하고 싶어도 못할 시한부 인생의 이명박 대통령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불의한 권력과 거세게 한 판 붙음으로써, 할 말을 하는 언론인으로서 족적을 남길 ‘행사 기간’입니다.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가 수의를 입고 수갑을 차는 사진 한 장은, 그를 이 시대 최고의 저널리스트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석희 교수의 그 ‘전과’는 훈장이 됐습니다. 기회입니다. 불의라 판단되면 맹렬하게 맞섭시다.

여러분이 사리사욕을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까? 그렇다면 당당하십시오. 저 자들에게 힘과 돈이 있고, 우리에게 그게 없다고 낙심됩니까? 우리에겐 무기가 있다는 점, 잊지 마십시오. 그게 무엇이냐. 염치입니다. 저들이 염치를 모르니 막 가는 겁니다.

여러분, 역사라는 게 뭡니까? 염치없는 것들이 난장을 피우다가, 염치 있는 사람들이 상황을 정리하는 겁니다. 그래서 종국의 주인공은, 승자는 바로 염치 있는 사람들입니다. 부끄러움을 알고 광장에 나온 여러분, 시민에게 배포한 투쟁 전단지에다 ‘반성문’이라고 적으셨지요? 김인규 사장 일당이 난도질했던 KBS의 공정성, 부끄러운 상태에서 하는 약속이지만 '언젠가 바로 잡겠다'는 다짐을 하셨습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국민은 감동을 받았고 믿게 됐습니다.

여러분에게 승리하시라는 말씀 대신 염치를 지켜달라고 당부하겠습니다. 그러면 이기니까요. 새 노조 출범이 공영방송 KBS가 바로서는, 위대한 이정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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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대 퍼옴] 한겨레를 위한 변명

변명은 옹색하고 비겁하기 마련이다. 지금부터 한겨레에 대한 옹색하고 비겁한 글을 쓰려고 한다. ‘놈현 관장사’ 운운하여 파문을 일으킨 <한겨레> ‘직설’ 코너(이하 ‘관장사 직설’)가 나로 하여금 한겨레를 변명하게 만들었다. 변명을 하려면, 사과부터 해야 한다. 사과 없는 변명은 적반하장이 될 터인데, 나는 도리어 매를 드는 도둑이 되어볼 용기까진 없다. 언론은 ‘언어 정치’를 한다. ‘언어 상품’을 판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한겨레>의 ‘관장사 직설’은 순진한 생각에 기초한 잘못된 언어 정치였고, 소비자의 수준을 낮춰본 실패한 언어 상품이었다. 한국의 시민 또는 소비자는 마땅히 이를 비판할 수 있고, 거부할 수 있다. 심지어 불매(절독)를 다른 이에게 종용할 수도 있다. 그것이 시민·소비자 민주주의다. 그 앞에서 <한겨레>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수밖에 없다. 소비자·시민 앞에 생산자·언론이 할 도리가 그것 말고는 별로 없다.  

1997년 가을, 한겨레신문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내 마음은 완전히 푸근했다. 당시 대표이사부터 편집국장, 사회부장, 사회부차장, 경찰팀장에 이르는 ‘위계상 상급자’ 모두 넓은 의미에서 운동권 출신이었다. 도도한 면면들은 70년대 민청학련부터 90년대 학생운동 정파까지 두루 포괄하고 있었다. 알고 보면 모두 ‘왕년에 한 자락씩 한’ 인물이었다. “이 정도면 인생 맡겨도 되겠다” 생각했다. 한겨레가 운동권 집합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언론사와 달리 ‘운동권 출신도’ 많이 들어와 있다. 운동권의 폐해가 적지 않다. 운동권 출신 가운데 사회에 해악을 끼친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일신의 안위가 아니라 세계와 사회를 고민하며 명분과 가치를 추구했던 작풍·태도·관점은 매우 소중하다. 그렇게 살아온 이는 그렇지 않았던 이와 삶이 다르다. 그렇게 각자의 청춘을 보내며 당대를 살아낸 쟁쟁한 선배들이 있어 나는 기분이 좋았다.  

푸근한 마음을 더욱 혹하게 만든 두 번째는 민주주의였다. 1989년 창간이래, 한겨레는 대표이사와 편집국장을 선거로 뽑아왔다. 구체적인 선거제도는 변화를 거듭했지만, 주주·사원·기자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관철시키려는 최초의 구상은 큰 흔들림이 없었다. 선거를 하면 여러 후보들이 나선다.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구상한다. 유권자들이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며 개입한다. 2년 또는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그런 선거 과정에서 한겨레는 ‘집단적인 허물벗기’를 한다. 예컨대 다음 대표이사·편집국장 선거 때는 이번의 ‘관장사 직설’ 파문이 반드시 도마에 오를 것이다. 주주·사원·기자들은 이번 사태를 분석하고 논쟁하면서 새 리더에게 이리저리 요구할 것이다.  

선거가 있으면 일상적 민주주의도 작동하기 마련이다. 한겨레는 사내 여러 매체를 통해 이런저런 분란이 항상 많다. 늘 말이 많아 소란스럽다. 이번 일도 한겨레의 일상적 민주주의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거추장스럽고 소모적이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방안’을 내놓는데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 그러나 ‘최악의 오류’를 피하는데는 반드시 필요하다. 한겨레는 민주주의를 통해 최악을 피해 왔다. 그리고 그 방식으로 ‘장사’를 해왔다. 한겨레가 한국 최초의 사회적 기업이자 거의 유일한 ‘민주주의 기업’이라고 나는 믿는다. 기업은 생존과 확장을 목표 삼는다. 생존과 확장의 방식을 민주적으로 결정하면서 그 결과 민주주의에 기여하자는, 터무니없는 목표를 세우고 한겨레는 22년을 지냈다.

그러나 최초의 놀라움과 환희를 빼고 나면, 입사 이후 10여년은 크고 작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실망의 대부분은 나를 환호하게 했던 바로 그 두 가지에서 비롯했다. 한겨레 사람들은 저마다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잘못을 좀체 인정하지 않는다. 귀가 두껍다. 한겨레는 민주주의 조직이다. 그래서 오류조차 민주적 동의를 얻어 관성화된다. 안 변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한겨레에 몸과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은 다시 한 번 믿음 때문이다. 우리는 오류를 극복할 만큼 치열하다는 믿음, 그리고 민주주의는 오류조차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라는 믿음이다. 믿음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질 것이다.

창간 이후 90년대 후반까지 한겨레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었던 논쟁은 ‘DJ 문제’였다. 이제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도 아련하겠지만, 90년대 후반까지 한겨레는 ‘DJ 편향’ 문제로 늘 시끄러웠다. 실제로 한겨레 사람들 가운데는 88년, 92년, 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의 당선이 유일하고도 가장 현실적인 ‘민주적 진전’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 가슴 속의 신념이야 양심의 문제지만, 그런 믿음을 기사에 관철시키면 공론의 문제가 된다. 한겨레는 공론장에 가끔 그런 믿음을 드러냈다. 이를 비판했던 이들은 “언론은 공정·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논지를 주로 펼쳤다.

나는 ‘DJ 편향’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언론이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도 반대한다. 언론도 편을 들 수 있다. 편을 들어야 옳은 경우도 있다. 다만 언론은 ‘언어 정치’를 하는 기관이므로 입장과 관점을 표현할 때, 정교하고 현명해야 한다. 언론의 정치적 입장을 언어로 표현하는 ‘방법’이 한국에선 발달돼 있지 않다. 한겨레 역시 이 방면에서 무능했다. 한겨레의 민주주의는 내부의 입장을 모을 만큼 진화하지 못했고, 이를 드러내는 언어는 정제되지 않고 어설펐다. 김대중의 정계복귀 직후인 1995년 7월, 어느 논설위원이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칼럼을 실었다. 열흘 뒤,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칼럼이 다른 논설위원의 이름으로 실렸다. 그 시절 기사와 칼럼을 보면 매양 ‘내부 충돌’의 형국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진보정당 문제가 한겨레를 흔들었다. 2002년 가을, 몇몇 기자들이 진보정당 후원비를 내고 있다 하여 논란이 됐다. ‘정치적 중립’을 규정한 사규를 위반했다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무려 6개월 동안 게시판·노보 등에서 토론이 이어지다가 2003년 1월 오직 이 문제를 판가름 지으려고 사원총회까지 열었다. 당시 투표율이 75%였다. 한겨레에선 ‘대단히 낮은’ 투표율인데, 이 문제를 투표에 붙여 ‘강제’하려는 것 자체를 비판한 젊은 사원들이 사원총회를 ‘보이콧’한 결과였다. 당시 논쟁에선 기자들이 정치권에 몸담는 일,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차이, 시민단체 후원 문제 등까지 두루 등장했다.

결국 지난 20년에 걸쳐 한겨레는 ‘잠정 합의’ 같은 것을 형성했다. 어느 정치세력과도 개인 또는 집단의 차원에서 밀착하지 않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한겨레 사람들은 어떤 정치세력도 신뢰하지 않는다. 한겨레도 조직인지라 ‘조직 논리’가 있다. 시장·국가와 사활을 건 싸움을 벌이는 동안 그들 정치세력이 한겨레에 도움이 된 적은 거의 없었다. 다만 그 정치세력에 가담하는 ‘개인으로서의 시민’들은 본원적으로 한겨레의 바탕이 됐다. 이 기묘한 딜레마가 한겨레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한겨레는 세력이 아니라 시민이 만들었는데, 그 시민들은 저마다 다른 정치세력에 긴박되어 한겨레를 소비하고, 한겨레는 그 세력들을 불신하거나 적어도 거리를 둔다. 이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공교롭게도 노무현 정부의 출범 시기는 한겨레의 ‘입장’이 나름의 진일보를 형성하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특정 정치세력이 집권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상 사라졌다. 그런 신념을 가진 개인이야 지금도 있지만, 적어도 공론의 차원에서는 이를 드러내지 않게 됐다. 이를 통해 한겨레는 민주 정부조차 맹렬히 비판할 수 있는 내부 동력을 얻었다. 김대중 정부 시기의 혼란을 거친 한겨레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거리두기와 비판하기’에 있어 별 거리낌이 없었다. 당선 직후 노무현 대통령이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했을 때, 다수의 (특히 젊은) 기자들은 그를 돌려보내지 않은 간부진에게 크게 항의했다. 오겠다는 정치인을 돌려보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데도 한겨레의 ‘정치적 감성’은 그걸 마뜩치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한겨레의 민주주의는 ‘최선’을 마련하진 못했다. 거리를 두고 비판하는 것 말고, 일관된 맥락과 입장을 정리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바로 그것이 노무현 정부 시기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한겨레에 대한 독자·시민의 실망과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한겨레는 노무현 정부에 대해 비판적이었나. 그렇다고 답하는 이도, 아니라고 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한겨레 안에서도 그 물음은 복잡하게 가지를 친다. 왜 비판적이었나. 무엇을 근거로 어떤 경우에 어떻게 비판했나. 이라크 파병은 대통령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나. 한미FTA 체결을 반대하는 것은 근본주의적 몽상에 불과한 것인가. 가장 신자유주의적인 거대 언론사 총수를 주미 대사에 임명하는 것은 또 다른 권언유착이 아닌가. 사회 안정망이 붕괴한 것은 정책 방향의 잘못이었나, 보수 세력의 저항 때문이었나. 한겨레는 정책을 비판했어야 했나, 보수 세력을 비판했어야 했나. 정책 비판이 우선인가, 보수 세력 비판이 우선인가.   

이런 물음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한국의 언론, 특히 신문은 대단히 ‘정치적인 상품’이 돼버렸다. 자본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중앙일보>를 제치고 <조선일보>가 여전히 ‘비교 우위’를 지키고 있는 것은 <조선일보>가 ‘더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더 이데올로기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한국 신문은 근대 이후 끊임없이 정치 구조, 특히 엘리트 권력 구조에 개입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넓은 의미에서 ‘민주화 운동’ 역시 그 시도 가운데 하나이며, 한겨레 역시 정치 구조에 대한 (계몽적) 개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정치 (시장) 구조에 밀착한 상품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예민하고도 정확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비자가 선택하는 상품이라면 그 상품의 기능 역시 정치적으로 민감해야 한다. <한겨레>의 입장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 것은 <한겨레>가 발 딛고 선 시장이 바로 정치적 시장이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정치가 작동할 때 흥하고, 정치가 사라진 곳에서 쇠락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 현재의 모습으로 계속 ‘관성화’된다면 그렇다.  

사소한 정치적 실수가 매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상황이 지긋지긋하다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정치적 논쟁에 매체의 미래를 맡기는 게 신물 난다면, 그 시장을 바꾸면 된다. 정치 구조에 작동하는 대신 시민사회에 소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면 된다. 권력에 대한 개입과 조정의 소명의식을 조금 줄이고, 시민사회의 저변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옮겨가면 된다. 그런데 한겨레의 민주주의는 그 진화에 속도를 붙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주의가 온전히 작동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커졌다. 민주적 소양을 갖춘 구성원도 줄어들고 있다. 한겨레의 민주주의가 지나치게 ‘고비용 저효율’의 방식이 아닌지 의구심도 확산되고 있다.  

그 과도기에서 여러 기자들이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 5월 만들어진 <한겨레>의 ‘직설’은 권력지향적인 정치구조의 맥을 시민사회의 언어로 짚어보려는 시도였다. 그 담당 편집자는 과거 <한겨레21>에서 ‘쾌도난담’ 란을 만들어 사회 주요 쟁점에 대한 거리낌 없는 도발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아마도 <한겨레>의 쾌도난담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이런 ‘언어 전략’에 문제가 있나. 아니다. 감히 말하자면 이런 시도가 계속 되어야 한다. ‘저들만의 리그’로 변해가고 있는 정치·정책의 언어를 평범한 시민들이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저잣거리의 담론으로 바꿔야, 한겨레도 살고 한국 시민사회도 산다. 기왕 정치 상품을 만들 것이라면, 국회의원만 읽는 기사 말고 시민들이 기꺼이 읽는 기사를 써야 한다. 정치담론의 민주화야말로 ‘시민 민주주의’의 고갱이다. 적어도 이 점에 관한한 정치인 노무현의 구상과 ‘직설’ 편집자의 구상은 일치한다.

 

‘관장사 직설’ 파문은 어떤 면에서 한겨레의 인과응보다. 의도가 아닌 결과를 두고 정치권력을 비판했던 한겨레는 마찬가지의 논리로 비판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패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지나치게 폄훼하고 까불었다. 적어도 그렇게 비쳤다. 언어는 생산자의 의도가 아니라, 청취자의 이해가 더 중요하다. 그것까지 고려하여 ‘발화’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글을 쓰는 자는 전체 텍스트의 맥락을 이해할 것이라 기대하지만, 글을 읽는 이는 그 파편만 떼어 내어 전체를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놈현 관장사’를 뽑아내어 전체를 읽으라고 유혹했다. 잘못된 언어 전략이었다. 그것은 시민의 언어가 아니라 천민의 언어였다. 그러니 잘못이고, 그게 싫으므로 더 이상 한겨레를 소비하지 않겠다고 해도 별로 할 말이 없다. 결함 있는 상품을 만들었으면 사과하고 리콜하는 게 상도의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 그리고 노무현 정부를 넘어서자는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다. 가능하면 더 현명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더욱 확산되어야 한다.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은 정치인의 ‘의도’를 모두 배려하고 이해해야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정치권력은 정책, 그리고 그 정책을 설명하는 언어로 평가받아야 한다. 지금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은 결코 이명박 대통령의 성실한 일상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이명박 정부는 그 정책의 수준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대통령의 사망 이후 그의 의도와 심중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긴 했지만, 그걸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 하여 언론의 비판에 결함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 적힌 구차한 변명을 모두 이해한 다음에야 한겨레를 절독할 수 있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관장사 직설’ 파문은 어떤 면에서 한겨레의 인과응보다. 의도가 아닌 결과를 두고 정치권력을 비판했던 한겨레는 마찬가지의 논리로 비판당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한겨레를 둘러싼 범 진보진영이 ‘공동체적 연대’에서 ‘합리적 비판과 견제’의 시기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다. 그것을 가슴 아프게 인정한다. 이제 한겨레는 더 이상 의도와 취지를 내세워 이 신문을 구독해달라고 요청할 수 없는 국면에 다다르고 있다. 그것이 어떤 결말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연대의 정신이 사라진 땅 위에서 우리 모두 과연 무사할까. 과정이 아닌 결과를 평가하는 언어로 우리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그 미래를 확신할 수 없다 하여 이제와 돌이킬 수는 없다. 이 게임을 한겨레가 먼저 시작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분명히 있다.  

남는 문제가 있다. 좋은 언론을 기대하고 주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좋은 언론은 무엇인가. 좋은 언론은 ‘우리끼리’ 모여 또 하나 만들면 생겨나는 것인가. 언론이 좋은 방향으로 진화하고자 할 때, 무엇에 대해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정치적 상품에 대한 정치적 항의를 하는 정치적 소비자가 그에 대한 답도 함께 제기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겨레에 남겨진 화두는 더욱 중대하다. 스스로 좋은 언론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핍박받으며 외롭게 지냈으며 스스로 성취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다시 오는 와중에도 줄기차게 이 자리를 지켰다는 자기 연민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거 혹시, 오만함 아닌가. 20여년의 역정을 충분히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피해의식은 아닌가. 그래도 좋을 만큼 충분히 현명한가. 그렇게 내놓는 상품은 충분히 지혜로운가. 어정쩡하게 정치에 발을 걸치고, 정치적 언어를 쏟아내면서, 정치적 비판은 그저 귀찮기만 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런 종류의 정치는 도대체 어디다 써먹을 작정인가. 진정한 자기정립없이 극좌로부터 극우에 이르는 저 정치적 독자들에게 이 신문을 봐야 하는 이유를 뭐라 설명할 것인가. 그런 정치 시장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또 그 대안은 충분히 마련했는가.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면, ‘관장사 직설’에 대한 한겨레의 1면 사과문은 좀 더 멋있었을 것이다.  

내가 꿈꾸는 한겨레는 노무현 정부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사회·경제구조를 저잣거리 필부들의 언어로 말하는 언론이다. ’관장사 직설’ 파문은 그 필요성을 더 절절히 깨닫게 했다. 정말이지 민주당·국참당·진보정당에 속박당하지 않고, 시비 잡힐 멍청한 짓 하지 않고, 권력·정당·시장으로부터 판판이 배신당하는 시민들에게 꼬박꼬박 읽혀 그 삶에 행복이 되는 그런 언론이 필요하다. 내 책상 옆에는 ‘근조’라고 적힌 검정 리본이 2년째 매달려 있다. 이승만·박정희·김대중·노무현·김일성·김정일에 이르기까지 거리낌 없는 정치언어를 열정적이면서도 유쾌하고 친근하게 시민들과 나누는 언론을 만들자고, 2년 전 추모 대열에 줄지어 서있을 때 결심했다. 그는 나의 꿈에 박수를 쳐줄 것이다. 그것이 내가 그를 추모하는 방식이다.

출처 / 인권연대 홈페이지 [링크]
글 / 안수찬 (한겨레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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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대학보 창간 38주년 기념 좌담] 대학신문이 나가야 할 방향


▲ 좌측부터 정준영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황윤억 한국방송대학보 4기 편집국장(소년조선일보 차장),김용민 시사평론가, 전종윤 중대신문 국장(전 중대신문 편집국장), 유미애 한국방송대학보 편집국장  

 
○ 좌담 참석자 : 정준영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김용민 시사평론가/ 황윤억 한국방송대학보 4기 편집국장(소년조선일보 차장)/ 전종윤 중대신문 국장(전 중대신문 편집국장)/ 유미애 한국방송대학보 편집국장
○ 좌담 진행 : 이승한 한국방송대학보 보도부장
○ 좌담 정리: 안선정 한국방송대학보 기자
○ 좌담 일시 : 2010년 5월 10일(월) 19시
○ 좌담 장소 : 한국방송대학보사 회의실     

 
사회자: 오늘 좌담을 진행할 방송대학보사 보도부장 이승한 기자이다. 먼저 좌담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대학신문의 위기가 심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이번 좌담을 통해 대학신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오늘의 이 좌담은 저희 방송대 학보의 방향성을 잡아가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쪼록 패널 여러분들의 고견을 기대하겠다. 좌담은 자유토론 방식으로 진행하도록 하겠다.

사회자: 먼저 저희 대학신문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고 싶다.

김용민: 방송대를 다녀봐야 학보의 유용성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겠지만 또 타 대학 학보에 비교한다면 대단히 훌륭하다고 평가하고 싶다. 독자가 아님에도 내용이 알차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1면에서 다뤄지는 기사들이 학생들이 원하는 기사인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해 보였다. 학보에 다양한 기능이 있지만 소식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정준영: 여러 대학신문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가 쉽지 않았지만 방송대학보는 다른 대학신문에 비하면 일간지에 가깝다. 또 다른 대학 신문들이 뭔가 논단적인 성격이라면 우리 학보는 실생활에 밀착돼있는 정보가 많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어 보인다.
유미애: 방송대학보는 100% 학생들이 낸 구독료로 제작되고 있다. 그렇다보니 다른 학보에 비해 학교에 대한 비판에 자유롭다.
김용민: 국민대 편집국장이 교직원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충격이었다. 주간교수가 나름대로 의지를 가지고 학보에 새바람을 불어 넣으려는 시도를 했었음에도 좌초됐다고 한다. 그야말로 대학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하기 위해 교직원을 학보 편집장으로 세운 것 아니겠나. 학내 비판이 더 이상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은 대단히 위기다. 편집권 박탈도 아니었고 정말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사실 학보 기자들이 편집권을 지킬 능력이 없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되겠지만 그러한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본다.
전종윤: 중대는 학부생 편집장이 있고 편집국장이 따로 있다. 편집국장의 역할은 간사 정도로 보면 된다. 공식적인 신분은 교직원으로 되어 있다. 타 대학 신문사에도 간사들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국민대도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현재 중대는 두산 법인이 들어오면서 우리나라 대학 중 이슈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편집국장으로 학교 측 압력을 완충하는 역할을 한다지만 타협을 제시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현직에 있으면서 학생기자들의 편집권이 축소되는 것을 느낀다.
황윤억: 대학신문사의 편집독립권 이야기로 넘어온 것 같다. 이 부분은 끊임없이 얘기되어 왔던 부분이다. 간사가 있을 경우 신문의 퀼리티 유지 면에서는 장점일 수 있다. 따라서 학보 경험이 있는 기자를 간사로 둬 수습기자 교육이나 편집에 도움을 주는 정도라면 괜찮다고 본다.
정준영: 현재 우리 언론의 상황을 보면 뚜렷하게 나타나듯 제도가 아무리 잘 완비되어 있더라도 사회 구조가 어떻게 운용되는가의 문제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과거에도 사립대학의 경우 개인적인 지배체제가 견고한 대학일수록 편집권 침해나 편집권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존재했다. 하지만 과거 대학신문은 독자인 학생들이 신문의 지지자였고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현재 학생들은 대학신문의 공동의 기반 형성을 하지 못하고 원자가 되었다는 것. 더 이상 대학신문을 지지하는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사회자: 대학신문의 위기가 대학신문의 미래가 없다는 어두운 전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 3일자 서울대신문은 또 다시 표절시비로 인한 사과문과 함께 해당 기자를 중징계했다고 밝혔다. 대학신문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다. 과연 대학신문에 미래가 존재한다고 보나?

정준영: 아까 말씀드린 이야기에 연속선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학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면 대학신문 역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과거 우리 사회 속 대학들이 갖고 있던 정체성이 약화된 상황이다. 대학을 구분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고 어떤 학생을 어떤 대학에 넣어도 구분되지 않은 상황이 됐다. 대학신문만의 시각을 담아내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힘들어졌다. 대학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신자유주의 변화 속에 놓여 그 틀안에 있게 된다면 대학신문이 제대로 존립하기란 어렵다고 본다.
황윤억: 그 의견에 대해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오히려 대학이 위기를 겪고 있다면 대학신문의 역할과 공간은 더 많아지고 넓어질 수도 있다. 대학이 지난 8~9세기부터 지금까지 존재해왔듯 대학신문도 그 맥을 같이 할 것이라고 본다. 과거 1980년대 대학신문이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소위 일간지 저널리즘이 하지 못한 역할을 대학신문이 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계속적으로 위기상황이 존재했다. 결국 대학신문의 미래는 대학과 함께 학교의 발전방향과 가치를 찾으며 독자인 학생들의 욕구를 채우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대학신문은 충분히 살아남을 것이다.
김용민: 대학신문 위기 속 학보의 역할과 그 부분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요. 전적으로 동의한다. 무엇보다 대학신문이 존재하려면 담론의 형성과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회복해야 가능하다고 본다.

사회자: 김 선생님은 대학신문의 차별성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현직에 있는 유 국장님과 전 국장님은 어떻게 생각하나?

전종윤: 미래에도 대학신문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이 존재하는 한 대학신문을 쉽게 없앨 수 없는 측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고 또 누군가 없앤다고 할 때 결단이 필요한 데 그 짐을 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앞서 황 선생님께서 위기의 상황에서 오히려 대학신문이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는냐 말씀하셨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의 정책결정자는 대학신문을 배척할 수도 있다. 문제가 발생되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많은 압력들이 들어오게 될 터이고. 이런 분위기라면 대학신문은 존재하되 홍보지나 정보지 수준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많이 고민스럽다.
유미애: 독자인 학생들 자체가 학업과 졸업, 취업 이외에 정보에 관심이 적다보니 대학신문의 제 기능을 다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 참여를 끌어당기는 학보를 만든다는 것이 가장 큰 과제가 되었다. 자칫 이러다 대학신문이 학사정보 위주의 정보지로 남게 될까 우려된다.

사회자: 방송대의 특성을 감안하지 않을 순 없겠지만 이번 창간 38주년 설문조사 결과 학보에서 가장 많이 보는 것이 학사 관련 정보라는 결과가 나왔다. 대학신문의 기능이 이렇듯 축소된 데에는 어떤 요인이 있다고 보는가?

황윤억: 학사정보를 보는 독자가 많은 것을 꼭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가독성과 열독성이 높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학사정보를 잘 챙겨보는 학생들이라면 다른 기사들도 볼 가능성이 높다. 또 설문조사라는 것이 어떻게 이뤄지는 가에 따라 다른 결과가 도출될 수 있기 때문에 문항을 세분화했다면 비슷한 결과를 얻었을 수도 있다.
정준영: 방송대학보의 경우 정보공유가 1차적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학보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지금 대학들은 성적 차이에서는 비슷해지고 있다. 각각의 대학들이 별도로 있을 이유가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취업률로 차별화하려는 시도가 있는데 대학 스스로가 나름의 정체성 찾기에 나설 것이다. 학교를 경영하는 사람들의 정체성, 거기에 대해서 학생들이 학보에서 추구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학교 경영진들은 자신들의 의도대로 정체성을 만들어가려고 할 것이고 학보를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할 터인데 이에 대해 대학신문이 스스로 대안적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용민: 학사정보만으로 알 수 없고 파생될 수 있는 정보들을 긴밀하게 취재해 보도한다면 오히려 열독률을 높이는 요인이 될 수도 있겠고요.
또 제가 충남대 신문에 원고 청탁을 받아 20대 사회 참여가 부족하다라는 주제로 글을 썼는데 인터넷을 통해 퍼져나가면서 난리가 났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영향력이 크든 작든 속된 말로 뚜껑이 열린다, 꼭지가 돈다 정도의 자극이 되는 것에 따라 충분히 담론을 끌어낼 수 있다. 대학신문이 학생들의 관심사를 건드려준다면 담론 형성은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준영: 김 선생님 말씀에 연결되는 부분일 수도 있겠다. 일반적인 대학신문에는 이미지가 없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본다. 대학신문 대부분이 주간임에도 기사 작성 포맷은 일간신문 포맷을 따오고 있다. 포맷은 일반신문인데 주간신문으로 발행되는 것은 괴리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포맷부터 주간지 식으로 접근하고 변화한다면 담론에 초점을 맞춘 정보 위주가 아닌 담론을 형성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
전종윤: 이상적인 것 같다. 사실 대학신문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대학교 1·2학년 학생들이다. 담론을 형성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또 학보기자를 하고 있지만 대학생인 이들 역시 취업준비를 게을리 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경험을 쌓은 3·4학년 학생들이 투입되면 좋겠지만 그러지도 못한 상황이다. 10년 정도 대학언론에 몸담고 있으면서 느낀 것이 대학신문이 자리잡기가 더욱 어려워졌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대학신문에서 기대했던 진보적 담론은 이미 다른 매체들을 통해 섭취할 수 있게 됐고 학생들의 관심사가 정치·사회문제에서 개인적인 문제로 이동하는 시기를 거치면서 학생들과 대학신문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게 됐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결국 대학신문이 독자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중대의 경우는 학내소식의 신문의 중심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단계에 있다. 중대라는 매개를 중대인의 눈을 통해 사회문제를 접근하니 독자들의 반응 역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학언론이 사회 참여의식을 갖는 것은 필요하지만 거시적 관심이 아닌 독자친화적인 미시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해진 때라는 것이다.
황윤억: 전 국장님의 말씀대로 사실 대학신문에 위기에는 외부적인 요인이 크다. 결국 이제는 콘텐츠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령 오늘 아침 읽은 신문기사에서 나경원 의원의 인터뷰를 봤다.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다. 정치는 스토리라는 말이었다. 결국 신문이 사람 사는 얘기를 하는 매체라고 한다면 이야기를 만들어 독자들과 거리감을 두지 않도록 하는 것. 스토리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유미애: 이미 외부에는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거나 좋은 콘텐츠를 다루는 매체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학보에서 사회·문화·정치 등의 아이템이 다뤄질 때 식상하다는 얘기들을 듣게 될 때가 있다. 결국 우리 역시 어떤 사안을 다루든지 간에 대학신문이기 때문에 독자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포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다른 어떤 부분보다 중요시 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회자: 방송대의 경우 일반신문과 같이 독자층이 다양하다. 그렇다면 방송대학보에서 다뤄질 수 있는 콘텐츠는 어느 정도 범위까지 라고 보나?

김용민: 독자층이 다양하다는 것은 오히려 담론 형성에는 더 유리할 수 있다. 소위 좌와 우로 나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안에 대한 릴레이식 반박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또 방송대는 학생 수가 워낙 많으니 취재력이 담보만 된다면 기성언론에서 베껴 쓸 수 있을 정도의 담론 형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방송대학보는 독자에게 배달까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지 않나. 따라서 담론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1면 편성이 무척 중요하다.
유미애: 우리 방송대 학보는 종합면과 섹션면으로 나눠 기사를 편성하고 있는데 간혹 빨갱이 신문이네 좌파 신문이라며 학보사에 불을 지르겠다는 강성한 반응을 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용민: 그런 반응들을 모아 기사를 만들어 볼 수도 있겠다. 그것 또한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는 아이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매체의 격을 고려하되 진입장벽을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사회자: 자연스레 논조에 관한 부분으로 화제가 전환이 됐다. 사실 노동신문 남한판이라는 원색적인 표현을 들을 땐 현직 기자들 입장에서 다소 혼란스러울 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황윤억: 그런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든 존재한다. 대학신문이 지향해야 할 가치만 잊지 않으면 된다.
정준영: 이 부분은 아까 어느 정도 답이 나왔다고 본다. 먼저 대학이 학보에서 기자를 학생으로 제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학생들이 기자인만큼 학생들의 관점이 학보를 통해 표출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자: 대학신문의 기능적 측면에서 접근해 논의 해보고자 한다. 현재 방송대학보사는 구독료와 광고료로 운영되는 독립채산제로 최근 구독이 굉장히 많이 떨어져 심각한 운영난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반면에 종이신문보다 인터넷학보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비견한 예로 지난해 1만5천건에 이르던 웹페이지수가 4만~5만건에 달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온라인학보의 유료화나 광고유치의 문제까지 고민하게 됐다. 종이신문의 존속과 온라인신문 유료화 또 더 나아가 광고 상업성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한 말씀씩 부탁드린다.

김용민: 광고없이 구독료만으로도 학보사가 운영된다면 가장 이상적인 구조다. 그러다 안되면 광고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보다 먼저 독자들로 하여금 학보의 부가가치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획들 제안하고 싶다. 학보에서만 볼 수 있는 시험 정보같은 것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또 종이신문의 부가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온라인신문들도 종이신문을 제작하고 싶어하지만 여건이 안되는 곳이 대부분이다.
정준영: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당연히 학보대금이 등록금에 포함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제작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지니 종이신문 존립과 온라인 신문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사회자: 좋은 말씀들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대학신문이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종합적 견해를 한 말씀씩 부탁드린다.

황윤옥: 대학신문의 본질인 아카데미즘에 더해 독자들이 요구하는 변화에 진화해 나가는 것 자체가 아닐까 싶다.
정준영: 대학과 대학신문 양자 모두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대학신문은 안에서부터 정체성을 재구축해야 하는 사명 있다고 본다. 또 대학의 정체성에는 사회와의 연결성이 지닌 정체성이어야 한다는 것, 그 연결성 안에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라고 본다.
전종윤: 지금은 실질적으로 매체로서의 영향력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사회참여적 부분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지금 입지를 다져야지만 훗날 다시 대학신문의 본질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유미애: 학생들의 참여의식 자체를 끌어내는 것이 여러모로 의미가 크다고 본다.
김용민: 대학신문의 가치는 청춘의 특권을 공익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본다. 이에 따라 대학생들의 담론이 기성세대를 반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싶고 얼마든지 대학신문은 자존감을 깃발을 들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부디 자신들의 색깔을 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사회자: 다시 한번 좋은 말씀 감사드린다. 방송대 대학신문이 나아갈 길에 큰 도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 방송대학보 1584호 (2010년 5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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