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하용조 목사와 정치편향 설교

하용조 목사가 우리 곁을 떠났다. 족적이 많은 고인이었다. 나는 그에게 두 가지 존재의 의미를 떠올린다.


우선 목회자로서의 자질과 인품이다. 장로인 코미디언 구봉서 선생의 간증 중 일부다. “방송사로 한 전도사(하용조 목사)가 오더라도. 그러더니 예수 믿으라며 성경공부하자고 해. 신앙을 안 갖는다고 나에게 원망하던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 내가 그랬지. ‘이것 봐, 내가 예수 믿다가 대표로 망한 사람이야. 어서 가!’ 이랬는데 군말 않고 가더라고. 그런데 다음 날 또 오는 거야. 그래서 보냈지. 다음 날 또 오는 거야. 그래서 다시 보냈지. 또 오고 또 가고. 오기도 잘 오고, 가기도 잘 가고. 며칠 동안 이러기에 마지막에는 내가 막 화를 냈어. ‘여 봐, 내가 욕을 한 200가지 알고 있는데 된 놈으로 고른 10개 들어볼 테야?’ 그러니까 그때 또 가더라고. 그리고는 두 번 다시 안 와. 나중에는 보고 싶기까지 하더라고.”


하용조 전도사는 실종된 게 아니었다. 사업했다가 망한 동료 코미디언 고 곽규석 선생(훗날 목사가 됨) 내외와 구봉서 선생 부인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구봉서 선생 자택 안방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이를 모르고 일찍 귀가한 구봉서 장로, 황당한 표정을 짓고는 ‘다 나가’라고 했다. 그러나 도리어 본인이 부인에 의해 방 밖으로 쫓겨났다. 때는 겨울. 오일쇼크가 겹치면서 안방 빼놓고 보일러를 다 끈 터였다. 마루였으나 너무 추웠다. 큰 다리 부상으로 발 시린 것을 참지 못했던 구봉서 선생, 결국 안방으로 들어가 성경공부조를 등지고 누웠다. 잠시 뒤. 하용조 전도사는 메뚜기와 석청을 먹던 불우한 세례 요한 이야기로 열을 올리자 “고단백 로열제리를 자셨구만. 뭐가 불쌍해?”라며 딴죽을 놓았다.


그러나 말씀은 한 올 한 올 구봉서 선생의 마음에 전달됐다. 마침내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 전도에 나섰다. 성경공부 참여 연예인은 크게 늘었다. 한 번은 남성과 잠자리를 갖지 않은 여인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한 부분에 대해 한 동료 연예인이 의아해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하용조 전도사에게 물었다. 그러나 답은 구봉서 선생이 했다. “야 인마, 남편 요셉이 아내 마리아를 믿는다는데 네가 왜 시비야?”라고. 이런 낭만 속에 1976년, ‘마가의 다락방’이 아닌 ‘구가의 안방’에서 이렇게 연예인교회가 태동했다. 국내 최초 연예인 선교의 열매를 체험한 하용조 목사, 훗날에 개척해 교인수 7만의 온누리교회으로 성장시켰다. 다른 것보다도 구봉서 선생의 강짜에도 불구하고 얼굴색 하나 안 바꾼 하용조 목사의 인내가 빛난다. 애써 찾아갔을 때에 박대를 받은 것도 굴욕인데, 다음 날 또 찾아가 선의를 나타낸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죽었다 깨어나도 고인을 닮기 힘든 부분이다.


또 하나의 기억, 바로 정치적 지향점이었다. 하용조 목사는 한나라당 지지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당 지지하는 게 문제일리 없다. 이것도 하나의 소신체계라면 존중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본인의 지지 의사를 자신이 이끄는 교인에게 강론하는 자세는 분명히 잘못돼 보인다. 노무현 이회창 두 후보가 각축을 벌이던 16대 대선 직전, 자신이 발행인으로 있는 주간 ‘빛과 소금’에다 “둘째, 선동하거나 비판적인 사람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셋째, 불안정하거나 함부로 말하는 사람을 선택하지 마십시오. 넷째, 예측 불허의 사람을 선택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2002년 12월 15일자) 이는 조중동으로 일컬어지는 노무현 적대 언론이 노 후보를 비난할 때 애용하던 논리를 그대로 복창한 셈이다.


17대 대선에 이르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발언함으로써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 본인의 호불호를 강조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 안팎 신자에게 투표 기준을 제시하고 있으니 엄연한 정치 개입이었다 하겠다.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국면에서는 <국민일보> 특별기고를 통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통해 분노와 원망과 미움을 가지게 되면 모두가 불행해지고 파멸에 이르게 된다”며 서거 책임론에 휘말린 이명박 대통령을 두둔하고는 “이 시점에서 자살의 영을 막지 아니하면 그것이 전국적으로 유행병처럼 번지게 될 것이다”며 누가 봐도 고인을 격하할 의도가 서린 언사를 행했다. (2009년 5월 25일자) 부엉이 바위에 몸을 던진 맥락을 외면했던 것이다.


정치 지향적 설교가 금기시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다. 한국교회 강단에서 개인 구원의 범주를 넘어서는 사회 참여적 메시지가 보다 다양하게 펼쳐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온당하려면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 번째, 균형감을 확보해야 한다.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또 읽으려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그로써 접한 인식을 확신체계로 삼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사안의 본질부터 세부적 수치까지 빈틈없이 간파해야 한다. 특히 사회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은 없는지 적극 살펴야 한다. 이해가 부딪히는, 찬반이 뚜렷한 현안에 대해서는 양측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 설교가 맹탕일 것 같은가. 아니다. 한결 높아진 수준을 절감할 것이다. 때론 의도한 것과는 다른 그러나 한층 성숙한 결론으로 귀결되는 뿌듯함도 누릴 것이다.


두 번째, 신화화의 유혹을 버리라. 특정 인물과 사건에 대한 은혜로운 서사로 교인에게 감동을 주고 싶은 유혹이야 어느 목회자에게나 있다. 그렇다고 드라마적 요소를 과도하게 가미한다며 사실 왜곡이 된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된다는 논리는 억지에 다름 아니다. 아니다. 설교도 설득력이 생명인 연설의 일종이다. 특히 해석의 여지가 많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아주 냉정한 관찰자 시점을 견지해야 한다. 설교가는 작가보다는 기자에 더 가까운 직군이다.


세 번째, 섣부른 결론은 삼가라. 설교를 많이 아는 목사가 뭘 모르는 교인을 계몽 훈육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다. 경제수준이 나아지고 민주화가 진척됐다. 이에 따라 교인의 안목 또한 높아졌다. 교회 안에 부정한 관행을 일소하는 개혁 운동에 탄력이 붙는 것도 자연스럽다. 말세가 다가와 사탄이 발호하거나 교회에 빨갱이가 틈타서만은 아닌 것이다. 누구나 사리분별 능력이 있다. 섣부른 결론은 강요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6일 동안 온갖 주의 주장에 시달려온 교인은 목사 개인의 사상과 사유를 주입받고 싶지 않다는 점도 분명히 알아둬야 한다. 신중해야 한다. 항상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판단하십니까’는 투의 프레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마트폰 가입자가 올해 2000만을 넘긴다고 한다. 신자든 비신자든 국민의 절반이 예배 중에 목사 설교의 진실 여부를 실시간으로 검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팩트’의 힘이 격 있는 설교의 핵심요소다.


팩트 지상주의인 것 같은가. 그러나 무책임하게 정 가운데만 줄 서라는 설명은 아니다. 설교는 경향성(傾向性)을 띌 수 있다. 아니 띄어야 한다. 때론 편파(偏頗)적이어도 된다. 어느 쪽? 약자에 말이다. 애매한 것은 물론, 사회 전반의 판단과 규정이 어떠하다 해도 약자를 염두에 둔 메시지에는 탈이 없다. 어려운 주문 같은가. 아니다. 팩트에 정직하게 입각하면 약자 편에 안 서려 해도 서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매시 매분 매초 약자가 패하지 않은 때가 없으니까. 한진중공업만 보더라도 그렇다. 주주에게 배당금을 나눠줄 만치 부요한 회사가, ‘구조조정은 없다’던 노동자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정리해고했다. 고로 팩트는 노동자의 편이다.


하용조 목사의 설교에는 그런 의미에서 팩트에 기초한 세밀한 현상 진단이 아쉬웠다. 그럴 만 했다. 목회사역을 빛냈던 신자들-정계, 재계, 학계, 연예계 명망가들을 보면 대체로 ‘가진 자’ 즉 주류다. 첨탑이 우뚝 선 자리는 서빙고와 강남, 양지중에 양지다. 처와 처가쪽 인사가 옷 로비 청문회장을 드나들었을 당시에 받은 충격은 굳이 회고하지 않으련다.


이 때문에 한국교회를 넘어선 한국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고인을 위한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교회의 지도자를 넘어 시대를 품어줄 지도자에 대한 기대, 우리 시대에는 사치일까. 그저 평범한 목회자로서 하용조 목사의 일생을 기록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러나 고인, 편히 쉬시라.


/ 월간 '복음과 상황' 201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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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경쟁의 비복음성

방송사 취업 현실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주요 방송사 입사는 국회의원 백(Back)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백이 통하되, 웬만한 권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하긴 모 언론사의 경우, 오너와 성(姓) 또한 고향이 같은 직원이 유독 많다는 풍문도 있다. 수백은 기본, 수천대 일로 불어나는 경쟁률, 이런 복권 당첨 확률 같은 게임에 뛰어드는 청춘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 탓에 취업에 실패해 낙담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경쟁이 공정하면 지금 너의 슬픔은 정당하나, 경쟁이 애초부터 그릇됐기에 지금 눈물은 부당하다. '씨팔' 한 마디하고 잊어라."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경쟁 만능 세상이다. 주말 TV는 켰다하면 '오디션'이다. 신인 뿐 아니라 기성 활동가 역시 이 틀을 강요당한다. 대중은 열광한다. 왜 이럴까.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의 진단은 이렇다. "적어도 그 공간에서는 공정한 룰이 적용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모든 게임은 공정한 룰을 전제로 하지만 현실의 게임에서 공정한 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현실의 불확실성은 그런 룰이 언제 어떻게 불공정하게 작용할지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TV의 서바이벌 게임이라면 당연히 정확하고 공정한 룰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현실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게임의 룰이 적어도 TV 쇼에서만큼은 정확히 작동하리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중잣대다. 나의 경쟁에는 불안해하면서 남의 경쟁은 즐기다니. 경쟁은 온당하며 필연적이라는 인식 아래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를 '경쟁의 내면화'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경쟁은 깃발을 드는 순간부터 성립된다.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그 룰이 공정한지 여부를 따질 여유나 권한이 없다. 공연하든 은닉됐든 간에 이러한 '부당한 게임의 룰'에 맞춰야 한다. 한마디로 '까라'하니 까는 것이다. 경쟁은 오디션, 입사 시험으로 그치지 않는다. 기성 세계에 진입해서도 닳지 않는, 식상하지 않는 '경쟁력'을 강요받는다. 어학실력을 기른다며 직장인 상당수가 이른 새벽 영어학원에 몰리는 현실은 구문에 속한다. 늙어 보이지 않으려 성형수술을 피하지 않는 현실은 트렌드로 미화된다. 어떤 대학생은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얼빠진 소리를 전파에 나가도록 허용했다. 그 말에 분노해야 할 대중 특히 청춘은 되레 '키 작으면 루저'는 부차적 논란거리에 이목을 집중한다.


김용철 변호사는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반도체와 휴대전화에서 남은 이익을 한 2조원쯤 에어컨이나 냉장고 등 냉공조 사업부에 돌려서 우리나라 전 가정에 삼성 에어컨과 냉장고를 공짜로 줘서 LG가 망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런 지시는 실현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사실임을 전제하고 이야기하자면, 100여만명의 청춘을 취업 경쟁에 내 몬 장본인 중 하나는 근원적으로 경쟁을 원치 않는다는 심각한 역설에 직면한다. 이건희 회장만 그러는 게 아니리라. 경쟁을 '상대 죽이기'로 개념화하는 게 비단 경제뿐인가. 대한민국 땅에서 정치란 상대의 존엄과 철학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기주장을 관철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양비론이 될 것 같아 부연한다. 각하가 대표적으로 원흉이다.)


이런 무참한 사고를 하는 세대에게 나는 2010년에 낸 책 '고민하는 청춘, 니들이 희망이다'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무차별적 반인격적 경쟁구조에 길들여진 20대가 사회 중심세력으로 부상한다면, 지금의 기성세대가 생산성이 없고 사회 주도권을 상실한 초라한 노구(老軀)가 될 무렵이면 청춘을 서바이벌 게임에 몰아 넣은 기성세대는 반드시 부메랑을 맞을 것이라 확신한다. 인생의 황금기인 20대에게 그늘을 드리워 놓고 자신들에게는 화려한 노후가 펼쳐질 것을 기대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이다. 청춘을 경쟁에 옭아 놓은 줄이 자신의 목을 조일 것이라는 이야기다.


무차별적 경쟁, 이대로는 안 된다. 대안을 찾아야 한다. 우석훈 박사는 그 단초로 '상대평가 없는 대학'을 

주문했다. "경쟁력은 유럽에 뒤지고, 기초 교육은 미국에 뒤지고, 창의성은 사라지고, 저격수 같은 스나이퍼 정신만 길러주는 한국 교육, 지금 대학은 지옥이다. 절대평가가 지금 우리 대학생들에게는 절대로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구조적으로 친구를 적으로 돌리게 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학문도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기업도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등록금 조달 방법이 없어 절망하고, 취업에 실패한 탓에 낙담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청춘이 생기는 이유가 뭔가. 협동과 연대를 불온하다며 개인에게 온전히 문제의 해결을 떠넘긴 탓 아닌가. '너는 혼자가 아니란다'는 말이 감상적 멘트에 그치는 게 아니라, 상식의 체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어른이 할 일이다.


경쟁 없는 세상이 있을 수 있냐고 할지 모른다. 맞다. 한정된 기회와 비용을 모두가 나눌 수 없다면 불가피성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경쟁이 서바이벌 게임이 돼서는 안 된다. '이것 아니면 끝'이 돼 버리는 구조 말이다. (여담이지만 '신입사원'이라는 MBC TV 프로그램은 매우 위험했다. MBC 아나운서의 '위엄'을 강조하려다가 지원자들의 운명을 위태롭게 만든 것이다. 고재열 <시사IN> 기자는 "MBC 아나운서 오디션에 떨어지는 모습이 전 국민에게 노출된 사람을 KBS나 SBS가 뽑을 수 있을까?"라고 되물었다. 이 글의 제목은 "'약자에 대한 예의'가 없는 오디션 권하는 사회"다.) 1등 뿐 아니라 2등, 3등 심지어 예선 탈락도 각자의 가치와 존재 의미를 평가받을 수 있는 경쟁이어야 한다. 그래서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특정 지역 출신은 배제하고, 특정 국가에서 학위를 얻어 온 자는 우대하는 현실, 도마 위에 올려야 한다. 요즘에는 담임목사 후보자를 몇 주에 걸쳐 강단에 세워서 그 중 마음에 드는 한 명을 고르는 '슈퍼목사 K' '위대한 청빙'이 몇몇 교회에서 관행처럼 벌어진다고 하는데 외면해서는 안 될 개선 대상이다. 그래서 생각해본 것이다. 천주교의 체계를 따르는 것이다. 일정한 목회자 수업을 받고, 교단 차원에서 목사를 파송하는 방안은 어떨까. (무임 목사 문제를 해결함은 물론, 목사가 오너처럼 전횡을 일삼지 못하도록 하는 부수적 효과도 노릴 수 있으니 말이다.)


무한경쟁 사회에 대한 예언자적 일침은 고사하고, 자기들조차 그 프레임에 갇혀버린 교회. 이런 관행을 방치한다면 또 휘말린다면 같은 잣대를 교회에 강요할 수 있다. 늙은 목사 특히 머리 벗겨진 목사는 강단에 오를 기회를 막아야 한다. 했던 말, 수시로 리바이벌하거나, 예화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부실 설교' 목사도 설교 복을 벗어야 마땅하다. 헌금 수입이 신통치 않거나 교인수가 증진하지 않으면 성과 저조의 책임을 물어 교체해야 한다. 한마디로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다. 각성해야 한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지금의 적자생존(適者生存)식의 생존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지경이다.


/ 월간 '복음과 상황' 2011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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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목사 컴백 소고

전병욱 목사가 교회를 개척했다. 젊은 세대가 갈수록 등지는 개신교계에 ‘16년 간 교인수 2만 명 증대’ 등의 신화를 창출해 이목을 끌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성추행을 범해 삼일교회 담임목사직을 내놓은 오점도 있다. 이 오점, 두 말 할 것 없이 치명적이다. 여기에 더해 퇴직금을 비롯해, 주택 구입비, 활동 중단에 따른 생활비 그리고 치료비까지 쳐서 자신이 사임한 교회로부터 13억을 받고 또 추후 수도권에서의 교회 개척 금지 등 여러 약조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 구(區)에 교회를 새로 세웠다는 비난을 사고 있다. 본인은 상당부분 왜곡 과장됐다고 반박한다.

 

물론 전 목사는 목회직을 내놓으며 성추행 사실을 시인했고 사과했다. 사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인정하는 것은 상식이며, 이러한 전제 속에서 우리는 ‘재기’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과까지의 과정에서 전 목사는 스스로 도덕적 정당성을 상실했다. 피해 여성을 상대로 사건 은폐를 종용했던 숨은 악의가 들춰졌다. 또 더는 숨겨봐야 의미 없는 ‘확증’이 있었다는 점도 염두에 뒀을 것이라는 판단도 구구하다. 교회의 결정이었지만 비판 인사에 대한 명예훼손 등 어설픈 사법적 대응도 피하지 않았다. 사과의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이 우세하다. 이 점에서 전 목사는 ‘성추행범’이라는 떨치고 싶은 굴레를 당분간 계속 져야 한다.

 

이 사안과 관련한 나의 언급은 딱 여기까지다. 과거 같으면 조자룡 칼을 연상케 하는 날 선 비평을 쏟아냈을 나지만, 어째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할 말이 많지 않다. 비슷한 시기에 나 역시 교회를 개척했다. (출석한 교회가 없어 고통 속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로 내 소유가 아니고, 나를 간판으로 내세우는 교회가 아니다만.) 게다가 나는 ‘행동’은 아니지만 ‘발언’으로써 도덕성에 타격을 입었다.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등 미국 네오콘 인사를 향한 막말로 말이다. 성경은 혀로 하는 범죄도 다르지 않다고 적시한다. 남의 시선을 떠나 나 스스로도 그때 발언은 나 자신도 용납할 수 없다.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요컨대 ‘김용민과 전병욱이 다르지 않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나는 아무 항변도 못할 것 같다. 따라서 나는 그에게 돌 던지기보다는 그와 더불어 돌을 맞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과했고 사과한다. 8년 전이든,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든, 로그인해서 들어야 하는 제한적 접근의 성인방송이었든, 미군의 전쟁포로에 대한 간악한 범죄행위에 대해 ‘역지사지가 돼 봐라’라며 풍자 조롱했든 간에 말이다. 국회의원이라는 고위 공직자가 될 뜻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누구에 의해 들춰졌든 간에 나는 그 때 내 발언에 대해 조금도 옹호할 뜻이 없다. 그래서 구구한 언급과 해명 없이 ‘무조건 사과’로 일관했다. 선거에서 이기건 지건 이런 신앙인인 나의 반성은 진심이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시비를 재연케 하지 않겠다는 의지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언론은 또 대중은 그 사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선거 후에도 야권 패배의 모든 책임을 나에게 떠넘겼다. 한동안 나는 이걸 ‘죽어 없어지라’는 강요로 받아들였다. (그래서일까. 나와 달리 무고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했다. 죽음 아니고서는 이 무수한 비난의 고리를 끊을 수 없었다고 판단했던 그의 서러움에 감정이입 됐던 것이다. 실제 나는 선거 후 며칠간은 창문 밖 9층 아래로 몸을 던질까 생각했다. 그때만 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여섯 살 아들이 뛰어들어 와 나의 품에 안겼다. 그래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거는 원인이 아닌 결과로 말한다고 했던가. 나를 지지했던 분 상당수는 부질없지만 ‘그때 사과하지 말 걸 그랬다’라고 말했다. 사과하니 공격할 빌미만 제공했다는 것이다. 나에게 맹폭했던 KBS 뉴스 담당자도, ‘김용민만 비판했다’는 시청자 자문기구의 모니터에 “김용민 건은 (본인이 시인해) 사실이었고, 또 다른 국회의원 출마자 문대성 김형태 등은 의혹 단계였다”고 답변한 일도 있었다. 논문표절 문대성, 제수추행 김형태 두 사람의 죄과가 나보다 훨씬 무거운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이명박근혜’라는 현실권력과 조중동이라는 수구언론으로부터 엄호 받은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선 후 두 달이 다 돼 배지를 달 이 시점에도 두 사람은 기초적 사실관계조차 부정 부인하고 있다. 나는 후회해야 하나. 아니다. 나는 지금부터 모든 이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그 날까지 ‘막말 반성’을 거듭할 것이다.

 

내가 그러하겠으나 전 목사 역시 영원히 죄 짐을 져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문제와 관련해 진솔한 반성의 자세가 필요하다. (누군가 ‘영적 공무집행 방해’라는 말을 써서 실소를 자아냈는데,) ‘영적 공소시효’ ‘영적 사면복권’은 적어도 이 세상에는 없는 듯하다. 그런데 저간에 행한 설교에는 이 사안에 관한 언급이 없다고 한다. 그 죄 짐이 어찌 한 번의 시인과 사과로 지워질 문제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죄상을 스스로 세상에 알리고 참회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혹 이러한 노력을 게을리할 경우 설교는 하나의 기능, 재주로 격하될지 모른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진중한 처신과 개척 보류를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하지 않겠는가.

 

등에 죄의 혹을 진 사람으로서 또 다른 혹달린 자에게 훈계하는 것이 우스울 따름이다. 그러나 동병상련의 정을 담아 한다. 나도 그러하나, 그는 너무 위태롭다.


/ 월간 '복음과 상황' 201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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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은 왜 교회를 등졌나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나는 그의 덕으로 지금 ‘나는 꼼수다’ 열풍에 몸을 싣고 있다. 미국 순회공연 중 사사로운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었다. 신앙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고2때까지 교회에 출석했다. 아니,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성경을 10번 읽었어. 성경 고사, 퀴즈대회 1등은 모두 나의 것이었지.”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에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죽어서 지옥에 갔습니다”라는 설교를 접했다고 한다. 이는 그를 고뇌에 빠지게 했다.


“아니, 가롯유다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서 예수를 팔았을 텐데! 자살한 행적으로 봐서는 본인의 강한 의지가 개입된 것(예수를 인신매매한 것)도 아닐 텐데! 지옥 갔다고? 그렇게 신에게 실컷 이용당하고? 이게 뭐야, 씨발.”


그래서 그는 목사, 전도사에게 물었다고 한다. ‘정말 가롯유다가 지옥에 갔는가’라는. 아무도 속 시원한 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차피 신에 의해 그 인생이 쓰일 운명인데, 실컷 이용당하고 지옥행이라니 그런 설익은 단정에 납득되지 않았다. (참고하시라. 이런 고민은 사실 새롭지 않다. 중세에도 있었다. 단적으로, 외경인 유다복음을 보자. 예수가 인류 구원이라는 지상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유다와 미리 모의한 것으로 묘사했다. 따라서 유다의 구원 문제는 이미 정리됐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정경 밖에 이야기다.)


“만약 가롯유다의 역할이 없었다면 예수는 무의미하게 살 것이고, 나중에 (고난을 받으러) 또 내려와야 한다고.”


물론 이 말에는 너스레가 서려있다. 가롯유다의 예수 매매를 정당화한다는 논리로 받아들일 여지도 없다.


그래서 ‘가롯유다가 지옥에 갔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목사의 교회라면 나갈 의향이 있느냐는 일차원적 질문을 던졌다.


“나는 신이 없어도 불행하지 않아. 도리어 신의 간섭 아래 벌 받기 싫어 교회 나가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아.” “그런데 이런 얘기 어디 가서 하지 말라. 또 이런 저런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여기저기서 나를 설득하려 들 테니 말이야.”


이 일화는 특히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의 ‘오프 더 레코드’ 요청을 파기하고 첨언한다. 요절한 지인의 장례식에서의 일. 다들 슬퍼서 우는데, 한 목사가 유족들에게 “울지 마세요. 슬퍼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거 아주 잘 된 일입니다. (고인이) 천국에 갔잖아요”라고 설교했다는 것이다. 유족과 더불어 같이 우울했던 그는 목사에게 다가가 고요히 귓속말로 “뭐? 기뻐하라고? 이런 씨발 놈이 다 있나”라고 속삭였다고 한다.


“사람이 죽었는데 슬퍼하지 말라니, 그게 말이 돼?”


생각해보니 그렇다. 무사 제대할 확률이 99%인데, 또 '남자로 만들어준다'는 군 입대인데 왜 신병교육대에서 울고들 지랄인가. 하물며 세상 하직인데.


반칙을 싫어하고 자유를 희구하며 감성에 솔직한 김어준. 한국의 교회는 그를 다시 품기에 너무나 비상식적이고 억압적이며 위선적이다.


“한 귀로 듣고 흘려! 왜냐고? 내가 교회 나갈 일은 없을 거니까.”


나는 그에게서 교회의 해야 할 바, 가야할 길을 읽는다.


/ 월간 '복음과상황' 201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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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혁명이 선교에 방해된다고?

30년간 철권통치해 온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를 뒤덮고 있다. 바야흐로 듣도 보도 못했던 아랍 판 시민혁명이다. 물론 23년 독재를 끝낸 튀니지 시민혁명에 뒤잇는 것이라 ‘아랍 민주화의 원조’라는 칭호에는 손색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장기간 그리고 대단위 조직적 시위는 낯설다. 가깝게는 3년 전 미국산 쇠고기 협상 반대 촛불 시위라는 ‘나도 한때 해 본’,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거리 시위이건만….

독재자 무바라크는 사방의 퇴로가 다 막힌 고립무원 상태이다. 일순간이었다. 그렇다면 강산이 세 번 바뀔 동안 그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미국, 이스라엘 등 강대국의 전폭적 지지를 등에 업은 덕이다. 이집트는 회교권이긴 해도 비교적 비이슬람 문명과 융통성 있는 교류를 해 왔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와 베냐민 네타냐(이스라엘 총리)도 이집트 시민혁명에 박수를 보냈고 결국 마바라크는 하야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는 한국 개신교 안에 물밑 정서, ‘복잡함’ 그 자체이다. 이번 시민혁명을 주도한 세력이 이슬람형제단인 터라 강경 모슬렘이 발호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는 것이다. 벌써부터 ‘구관이 명관이다’라며 무바라크 체제를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다. 현지 선교사 중에는 ‘무바라크 체제에서는 과거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선교가 용이했다’는 이도 있었다.  (사실 이집트 역시 개신교 박해국으로 통하는 상황이다. 물론 다른 아랍국에 비해 신사인 편이지만.)

나는 이게 마땅치 않다. ‘개신교가 선교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독재까지 옹호할 수 있는가’하는 감회 때문이다. 사실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남로당 출신 박정희를 옹호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던 한경직, 김활란 등.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을 위해 축복 기도를 펼쳤던 한경직, 김창인 등 군부독재 정권에 대해 옹호하고 축복하고도 성자로 추앙받는 목회자들의 족적을 복기하면 말이다.

‘올드 보이’의 폐해만은 아니다. 2007년 ‘장로 대통령 탄생’을 목 놓아 외치던 현역 목사들의 실존적 문제이기도 하다. 이들은, 국가 지도자로서의 기본적인 도덕성은커녕, 철학 더불어 능력이란 찾기 힘든 대통령을 장로라는 이유만으로 절대 지지하고 있다. 그의 정치적 걸림돌이 된다 치면 ‘좌파’라고 낙인찍어 비난한다. (좌파라는 규정이 왜 모욕이나 비난의 표현이 돼야 하는지 모르겠다만.) 온 국토가 그로 인해, 공사판이 되는가 하면, 역병에 대한 초동 대응에 실패해 수백만 생명체의 무덤이 돼 버려도 말이다.

기우에 불과하다. 이제 이집트는 자유와 민주의 바람이 불 것이다. 이런 흐름에는 종교의 자유는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압제했던 모든 것을 해체했는데, 특정 신에 대한 신봉 행위만은 금기로 묶어둔다? 불가한 일이다. 본디 민주주의란 권력자의 한마디가 아니라, 주권을 가진 시민들의 토론과 논의 속에 모든 정책이 결정된다. 무슨 논리, 어떤 구실로 개신교 차단을 도모할 수 있을까. 따라서 민주화 투쟁은 개신교로서는 더 없이 환영하고 나아가 지지해야 할 일이다.

사실 민주주의와 개신교는 한 뿌리다. 인권, 자유와 책임 사상, 평등사상은 복음을 근간에 두고 있다. 세계사 책을 뒤질 것도 없다. 모두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외에 두루 평등하다는 교리는 민주주의를 발전시켰고, 이는 봉건적 권위 체계인 왕조 사상에 강력한 견제와 핍박을 당했던 바이다. 그러나 중세로부터 오늘날까지 교회는 교황이라는, 목사라는 또 다른 통제받지 않는 숭배 체계를 만들어 인간 위에 군림하도록 조장하고 있다. 이게 바로 복음의 변질이며, 이집트 체제의 변화보다 더 우려해야 할 일이다.

직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이었던 신일교회 이광선 목사, “돈 써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밝혔다. (‘다른 사람도 그랬다’는 물귀신 전략을 취한 걸로 봐 진정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의 최대 서포터스인 한기총이 돈 선거 논란에 휘말려 책임질 사람 책임지고 뇌물 수수 관행이 종식될 가능성도 제로에 가깝다.) 이 사람은 참여정부 당시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종교 탄압으로 규정하고 삭발까지 했다. 개방형 이사 한두 명 끼게 하자는 방안이 종교 탄압이라니. 콜로세움에서 사자의 밥이 됐던 그리스도인들이 지하에서 듣고 웃을 일이다. 사립학교 안에 민주화를 실현해 투명한 운영을 도모하자고 하면 기를 쓰고 반대하고, 민주주의에 반하며 공안 통치를 일삼는 지도자는 장로라는 이유로 지지하고 찬양하는 개신교. 이쯤 되면 맛이 보통 간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집트 시민혁명은 걱정의 눈으로 관조할 문제가 아니라 무지하고 무력한 이 땅 이 교회와 사회가 벤치마킹하고 실행에 옮겨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썩어 빠진 구조, 두고 보자니 질식사할 것 같다. 그래서 쓴 글이다. 이걸로 갈음한다.

이런 글을 써 봤다.

“영문 이니셜 M으로 시작하는 대통령이 있습니다.

이(This) 대통령은 법치주의를 구실로 국민의 자유를 박탈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비판 세력인 야당과 언론을 거침없이 짓밟았습니다.
이 대통령은 종교 갈등을 심화시켜서 국론을 분열하게 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빈부 간의 격차를 더 늘려 양극화를 부추겼습니다.
이 대통령은 청년 실업을 방치해 젊은이의 꿈을 앗아 갔습니다.
이 대통령은 “형님만 믿습니다”라고 하며 미국 꽁무니에 달라붙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이런 독재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그러다가 물러나라는 국민의 목소리에 직면합니다.
이 대통령은 이를 테러리스트의 음모라며 매도합니다만,
이 대통령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국민 누구도 그의 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대통령은 곧 물러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 대통령은 쫓겨난 다음에는 재임 기간 동안의 부정부패에 대해서 가혹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대통령은 역사를 너무 우습게 알았던 것입니다.
영문 이니셜 M으로 시작하는 이 대통령은 이집트의 무바라크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만의 이야기라고 장담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입니다.”

/ 월간 '복음과상황' 2011년 2월호 (245호) '김용민의 MB뉴스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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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3 다운로드] 고 옥한흠 목사 대부흥100주년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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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 원로 옥한흠 목사가 하나님 곁으로 갔습니다. 고인을 기쁜 마음으로 환송하기 어려운 이유는 2007년 7월 8일의 설교 때문입니다. 그 설교는 도탄에 빠진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대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설교가 있고 보름이나 지났을까요.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독 청년들이 피랍당하는 상황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거친 질타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반년도 안 된 시점에 교회 장로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교회는 그를 밀었고, 그는 교인을 중용했지만,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공의, 사랑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옥한흠 목사의 그 설교 이후, 한국교회는 회복과 부흥보다는 퇴락과 침몰의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여전히 한국교회는 성장 패러다임에 젖어 물질과 교인수로 신앙의 열매를 가늠하는 저열함에 빠져 있습니다. 다시 이 설교를 듣습니다. 어설픈 추모와 회고의 의미보다, 고인을 회수해간 하나님의 분노를 읽기 위해서입니다. '교인이 욕먹는 세상'에 일조한 이 놈 역시 죄인임을 성찰하고 통회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여 살려주옵소서” 

요한계시록 3:1~3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할렐루야!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모처럼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서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을 기념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예배에 저와 같이 자격 없는 사람이 설교를 맡게 된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를 가로막는 악한 종이 되지 않도록 특별히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00년 전 한국 교회는 복음을 받아 들인지 불과 반세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믿는 사람도 3,4만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렇게 나약한 한국교회를 하나님이 특별히 찾아오셔서 성령의 불을 부어주셨습니다.

원산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성령의 불길은 평양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고 그 후에 연이어 한반도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러자 수년 사이에 수십만명이 예수를 믿고 교회로 들어오는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나라가 기울자 교회는 사경회라든지 3.1운동이라든지 사회계몽에 앞장 서면서 절망에 빠진 백성들을 끌어안아줄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에는 순교의 피를 흘려 한국 교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세계가 주목하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가능케 한 뿌리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평양대부흥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전무후무한 은혜를 100년 전에 이 땅에 허락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찬양하며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평양대부흥을 돌아보면서 무엇보다도 특별히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함께 강력한 회개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죄를 자복하도록 몰아부치지 아니하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회개였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무시무시한 죄의 공포가 우리 위에 임하였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그것을 피하여 도망할 수 없었다는 말도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장대현 교회에 모였던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밤새도록 가슴을 치고 통곡하면서 숨은 죄를 토해 놓았습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회개를 경험하면서 한국교회는 세상 앞에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왜 100년전의 부흥을 다시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입니까?

가장 절박한 이유는 한국교회, 다시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다시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100년 전과 같이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교회 안에 있는 악한 것들,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다 쓸어내는 회개밖에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한국교회 이래서는 안된다는 탄식을 오래전부터 듣고 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 100년 전과 같이 다시 한번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시고 우리 중에 임하셔서 성령의 불, 통회하고 자복하게 하시는 회개의 영을 한국교회에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소망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실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는 이 말씀을 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선 제가 너무 부담스러운 말씀이고 듣기에 거북한 말씀이고 기분이 좋지 않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 오늘 전하고 싶지 않아서 꽤 고집을 피웠습니다마는 주님은 밤낮 이 말씀에만 매달리도록 종을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전하고 싶어서 전하는 말씀이 아님을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른 손에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데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느니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었느니라’

이름이 살았다 하는 것으로 보아 사데교회는 평판이 꽤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은 ‘아 그 교회 대단하지, 대단해’하고 인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사데교회가 한 때 놀라운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 후광을 즐기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따라서 사람들 보기에는 살아 움직이는 교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열심도 뜨겁고 봉사도 많이 하고 예배도 감동적이고 뭐 하나 흠을 잡을 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 교회의 허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는 불행하게도 그 교회는 행위가 죽어 있었습니다. 행위에서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위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위가 무엇입니까?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사데교회 안에는 몇 사람을 빼고는 그렇게 사는 자들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데교회를 보면서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는 것 같다는 불안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수십년 동안 기적같은 부흥을 경험한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5만이 넘는 교회, 천만의 성도, 세계 제일의 교회, 새벽을 깨우는 대단한 열심, 남에게 뒤지지 않는 헌신, 만명이 넘는 선교사들, 많은 헌금, 큰 교회당 등 자랑거리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세계를 다녀 보십시오. 한국교회에서 왔다고 하면 다시 한번 우리를 쳐다봅니다.

겉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절대로 죽은 교회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충성하는 목회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목사보다 더 힘쓰는 평신도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자존심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누가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고 행위가 죽었다는 소리를 하면 저는 그 말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아니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저의 이러한 확신을 흔들어 놓는 심각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한국교회를 너무 불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목사의 신뢰도는 오래전부터 하위권입니다. 교회에 들어왔다 실망하고 등을 돌리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전도를 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무종교자들에게는 기독교가 제일 인기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리를 이중인격자로 보는 것 같습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면서 교회는 왜 그렇게 잘 싸우느냐고 비아냥 거립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자기들보다 더 정직한데가 어디 있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돈을 사랑하는데는 자기들과 똑같다고 봅니다. 사회의 각종 스캔들에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끼어도 이제는 더 이상 놀라지도 아니합니다.

한마디로 자기들하고 다른 점이 별로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도 우리는 이런 비난을 받으면서 한 마디 변명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예수 믿는 우리들의 도덕성, 가치관, 처세관을 놓고 보면 세상 돌아가는 쪽으로 더 많이 기울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는 세속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모습을 세상 앞에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짠 맛을 잃으면 우리보다 더 악한 세상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도록 내던지는 것이 주님의 징계요 심판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러한 끔찍한 상황에 놓여있지 않는지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주님께서 한국교회를 보시고 뭐라고 하실까요?

이름은 살았으나 행위가 죽었다고 책망하시지 않으실까요?

누가 ‘아니요’ 하고 변명할 목사가 있습니까? 누가 ‘아니요’ 하고 변명할 장로가 있습니까?

평양대부흥 100주년의 진정한 기념은 이러한 우리의 영적 비참함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가슴을 치는데서 출발해야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데교회를 보면서 제가 두려워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일곱별을 손에 쥐신 예수님께서 행위가 죽은 교회의 책임을 지도자에게 묻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데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사데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사자는 교회의 지도자요 목회자를 가리킵니다.

저는 주님께서 왜 목회자에게 책임을 물으시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수십 년 목회를 하면서 목자의, 목사의 입장에 서면 이름은 요란하지만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을 저는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여러분 아시고 싶습니까? 이렇게 하면 됩니다.

목사가 말씀을 가르치거나 설교를 하면서 복음을 조금씩 변질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복음이 얼마나 변질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를 정도로 둔감해지면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이름만 살았고 행위는 죽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복음이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에는 진리의 양면성이 들어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그 믿음의 진가는 순종하는 행위로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라 한다면 행위는 구원의 필연적인 요소가 됩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따로 놓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가리켜서 좋은 나무와 좋은 열매로 비유를 하셨습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믿음과 순종을 똑같이 중요하게 다루고 가르쳐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로마서를 설교했으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는 야고보서도 진지하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청중은 원래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을 선호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하늘의 복도 받고 땅의 복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면 ‘할렐루야!’ 하고 열광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져 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를 지적하거나 책망하면 예배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져 버립니다. 듣기가 싫고 몹시 거북스럽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는 비슷한 반응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중의 반응에 예민해지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 죄라든지 회개라든지 순종이라든지 거룩이라든지 하는 듣기 피곤한 말씀은 할 수 있으면 피하거나 꼭 말을 해야 할 때에는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하고 싶어 하는 유혹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절대로 바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절대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이 강단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 결과 저도 모르게 복음을 조금씩 조금씩 변질시키는 설교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믿음만 가지고 떠드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기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자꾸만 늘어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를 여러분 기억하실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하는 놀라운 복음을 재발견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의로운 행위는 아무런 공로가 되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비텐부르크에서 34년간 4000번 이상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루터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를 곡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순종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데 죄 좀 지었다고 해서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거냐’ 하면서 자기 욕심대로 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도시는 믿음의 방종이 난무하는 타락한 사회가 되어갔습니다. 이런 기막힌 상황을 지켜보면서 루터는 자기 설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설교를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목사라면 설교하기보다 차라리 수레를 끌고 돌을 운반하는 편이 낫겠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루터가 우리에게 주는 아주 값진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교회 지도자가 복음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믿음만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믿음의 열매가 되는 행함을 등한히 다루던지 무시하면, 입만 살고 행위가 죽어버린 사데 교회가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0절을 보면 바울은 유익한 말씀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전하고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을 포함하여 한국교회 많은 지도자들은 바울처럼 무엇이든지 거리낌 없이 전하는 용기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 것은 먹이고 쓴 것은 할 수 있으면 먹이지 않으려는 나쁜 설교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설교자는 청중에게 인기가 있어서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으는데는 성공할지 모르나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지도자 여러분!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주님의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몇이나 됩니까?

‘입만 살았고 행위가 죽어버린 교회를 만든 책임은 너희에게 있어’ 하고 따지신다면 ‘나는 아니오’ 하고 발을 뗄 수 있는 목회자가 몇 사람이나 됩니까?

평양대부흥의 진정한 기념은 복음을 변질시키고 행위가 죽은 교회를 만든 죄를 놓고 가슴을 치는 목회자들의 회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향하신 간절한 주님의 소원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주님은 행위가 죽은 사데교회를 향해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 회개만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향해서도 똑같은 명령을 하고 계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답답한 일은 우리 힘으로 회개가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 해 보셔서 아시잖아요. 우리 힘으로 회개 잘 못합니다. 입으로 잘못했다는 말은 수없이 할 수 있지만 죄를 끊어 버리고 단호하게 돌아서는 거룩한 결단은 잘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100년 전에 하디 선교사가 하던 회개, 길선주 장로가 하던 회개, 무명의 성도들이 밤새도록 추운 겨울 밤 찬 마룻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며 통곡하던 그 회개를, 오늘 한국교회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 비해서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죄를 더 짓고 사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회개는 점점 한국교회에서 형식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생명을 서서히 죽이는 암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하고 세상 앞에 새 옷을 갈아 입으려면 성령께서 회개할 힘을 우리에게 주셔야 합니다.

통회하고 자복하고 버리는 결단을 할 수 있도록 성령이 우리를 도와 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됩니다!

우리의 능으로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된 우리를 깨끗하게 청소하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100년 전과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이 땅에 강림하셔서 아낌없이 부어주셨던 성령의 불, 회개의 영을 다시 부어 달라고 힘을 다해 부르짖어야 될 것입니다! 부르짖고 문을 두드리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죽은 행위를 벗어 버리면 아직도 죽음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이 백성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온전한 복음을 다시 회복하면 온갖 더러운 죄로부터 그 죄에서 나는 악취로부터 이 사회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능력을 다시 입으면 북한의 무너진 교회를 우리 모두 다시 일으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성령의 거룩한 불이 타오르는 용광로가 되면 주님께서 21세기 세계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에 우리 한국교회, 불러 주실 줄 믿습니다. 믿습니다!

두 손을 높이 들고 여러분 따라 합시다.

주여! 한국 교회를 살려 주옵소서!

한국 교회를 살려 주옵소서!

통회하고 자복하는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

부어 주시옵소서!

부어 주시옵소서!

머리 숙여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이놈이 한국교회, 입만 살았다고 떠들고 행위가 죽어버린 한국교회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주여! 이것이 감히 설교할 자격이 없는데도 주님이 말씀을 전하라고 미천한 것을 몰아부쳤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겉모양은 요란하지만 내면은 죄악이 쌓여있는 이 한국교회를 주여, 불쌍히 여기시고 성령을 부어주시되 통회하고 자복하는 영을 부어주셔서 이 한국교회를 깨끗하게 해 주옵소서! 깨끗하게 하옵소서! 깨끗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민족에게 소망을 주게 하시고 이 나라를 바른 길로 인도하게 하시고 주의 거룩한 영광이 이 땅에서 경배를 받으시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녹취 : 박기범 님
/ 음원 : 극동방송 '좋은 아침입니다' 2010. 9. 3 방송분
/ 사진 : 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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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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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가 간증하는 '평화기도회'는 '영적 불법집회'


6월 2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예정된 평화기도회 안내 포스터를 봤다. ‘간증 강사 조지 W. 부시’! 충격과 경악을 금할 길이 없다. 전직 미국 대통령, 그 사람이다. 104개월째로 접어든 아프가니스탄 전쟁, 국지적 저항이 계속되고 있는 이라크 전쟁. 사망자가 자국군인만 5천 명, 침략 대상 국가의 군인 또 민간인까지 합치면 수십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쟁. 이 전쟁을 획책한 원흉이 되시겠다. 이 세상에 부시만 없었어도, 수십만에 이르는 이들은 누군가의 부모로 누군가의 자녀로 평화롭게 살았을 것이다. ‘평화기도회’ 주최 측이 “생뚱맞은 이야기를 해도 좋다”라고 하지 않는다면, 부시는 그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평화’를 강변할 것이다.

간증 내용은 안 들어도 딱 나온다. 911 사건 이후 테러 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밤 잠 못 이루며 주님께 도움을 구했고, 여러 경로와 과정을 통해 미국의 안전을 수호했으며,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했던 지구촌 조폭들을 일망타진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만드는 나라라고 주장했지만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는 내용은 일체 언급되지 않을 것이다. 일전에 이 코너를 통해서 9.11 직후 부시 행정부의 국무위원들이 모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를 부르며 전쟁을 획책하다고 소개한 바 있다. 기도면 살육도 용납할 하나님인가.

부시가 기독교인이라서? 미국이 기독교 문명국이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나라이고, 부시는 그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라서? 부시와 미군이 죽인 자들이 이교도, 즉 이방인들이라서? 아니면 초청한 사람과 가까워서? 주최 측은 말해야 한다. 왜, 무엇 때문에 부시가 ‘평화기도회’의 주빈이 되는지. 해명을 피한 채, 부시를 ‘평화의 전도사’로 세워 강단에 세우는 순간, 부시가 일으킨 전쟁으로 비명에 죽어간 이들, 팔 다리가 잘린 이들은 그대들을 공범 반열에 올릴 것이다. 아무리 종교가 다르더라도, 문명이 다르더라도 다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생명을 안고 태어난 이들이다. 인간이 그 생명을 좌우할 수 없다. 이 원리를 부정하는가.

혹자들은 부시가 가한 침략을 ‘정의의 전쟁’으로 명명한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는 정의의 전쟁을 말할 때는 일반적으로 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전쟁을 벌일만한 충분한 근거와 명분이 있는가. 즉 전쟁 개시의 정당성. 둘째, 일단 전쟁이 벌어졌다면 그 전쟁에서 지나친 폭력을 삼가는 등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고 올바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가. 전쟁행위의 정당성. 셋째, 전쟁 마무리 단계에서 전쟁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짐으로써 다음 전쟁의 불씨를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는가. 전쟁종식의 정당성이다.
 
‘화씨 911’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기한 의혹(‘911은 미국의 자작극이다’라는 설)부터 시작해, 이라크가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 제조국이라고 거짓 단정한 것까지. 부시가 일으킨 전쟁은 개시의 정당성부터 확보되지 않았다. 게다가 마구잡이 공습으로 민간인이 희생되고, 포로가 가혹한 고문과 처벌로 고통 받는 상황은 행위의 정당성마저 실종시킨 부분이다. 게다가 연일 폭동과 자살테러가 연발하는 현실은 종식의 정당성을 요원하게 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이 전쟁은 공화당의 물적 후견인 역할을 하는 군수업체를 위한, 세계 3위의 석유매장량을 가진 이라크를 장악하려는, 강대국에 의한, 기독교 문명에 의한 살육전이다. 지금이 구약시대인가?

나는 나의 옛 직장의 사장이었던 김장환 목사(현 극동방송 이사장)를 주목한다. 이 사람은 한국전쟁 당시 만난 미군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 가 밥존스대학이라는 학교에서 공부했다. 밥존스대학을 두고 보수신문인 <조선일보>는 2000년 2월 25일자에서 “ 이 기독교 사립대학은 서로 다른 인종간의 데이트를 금지하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학교”라고 묘사했다. (여담이다만, 김장환 목사는 이 학교에서 백인 동문을 반려자로 만났다.) 사실 설립자 밥존스는 이 대학을 세우면서 백인 이외의 유색인종의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많이 발전한 셈이긴 하다. 게다가 이 학교는 가톨릭도 이단으로 볼 정도로 근본주의에 가깝다. 극우 멘털리터로 똘똘 뭉친 극우의 전당인 셈이다.

그런데 부시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대선 레이스에 가세하던 2000년. 출정식의 의미도 담겨 있는 Kick off speech(예선) 장소를 이 학교에서 했다. 상징적이었다. 미국 우파 기독교는 이를 계기로, ‘불심으로 대동단결’이 아니라 ‘성령으로 대동단결’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믿는 대통령’을 창출했다. 그 ‘믿는 대통령’은 모슬렘 정벌의 화신이 돼서 ‘정의’의 이름으로 곳곳을 초토화했다. 우파 기독교는 환호했고 열광했다. 그의 시대는 반석 위에 선 것처럼, 교회의 탄탄한 지지 위에 8년을 달렸다.

김장환 목사는 이런 미국 우파 기독교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또 공화당과도 말 못할 깊은 연(緣)이 있다. 김장환 목사는 부시 당선 당시 ‘국내 몇 안 되는 당선자와의 교분을 가진 국내 인사’라는 명망을 발현한다. 이러다보니 부시의 ‘평화기도회’ ‘간증’에서 김장환 목사의 그림자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부시를 ‘평화’ 행사에 불러서 전쟁 범죄를 희석시키려는 의도, 아울러 남한 기독교인의 안보 정서 자극을 통한 대동단결을 꾀하려는 의도까지 어렵지 않게 읽는다.

문제의 심각성은 또 있다. 이게 미국의 일만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전쟁 불사’ 운운하며 지난 10년의 평화 기조를 다 깨버린 소망교회 현직 장로 이명박 대통령은 미국 우파 기독교, 부시, 김장환과 대단히 긴밀한 사이이며, 그들의 집권 노하우는 물론, 통치 이념부터 술수까지 모조리 베껴 쓰다시피 했다. 6.2지방선거로 허풍에 그친 ‘북풍’이라지만, 북한에 대한 응징 논리는 여전히, 정권의 실정을 가리고, 보수진영의 대단결을 도모하며, 아울러 집권 연장의 발판을 위한 수단으로 매우 유효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부시가 설레발 떠는 ‘평화기도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심각한 영적 불법집회임을 단언하는 바이다. 나는 예수의 가치를 참칭한 이 얼치기 우파, 쓰레기 보수들이 염치 모르며 하나님과 평화, 정의를 기만하는 일을 두고 볼 수 없다. 김장환 목사의 노회한 권모술수에 기독 청년들이 부화뇌동(附和雷同)한다면 이런 모순어린 부당한 현실은 기한 없이 연장 반복될 것이다. 낡고 비루한 기성세대 신앙인들에게서 독립하자. 그리고 청년의 지성과 열정으로 대항하자. 정권과 함께 무너지는 교회를 보고 싶지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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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청년에게] 이제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를 외쳐야 할 때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 당시 구호이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여야 중 누구의 구호일까. 당연히 야당일 것이다. 여기에 맞서는 여당의 구호가 가관이다.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그때로부터 정권이 아홉 번 바뀌었고, 국회의원 또한 남김없이 갈렸건만 ‘안정’과 ‘심판’으로 갈리는 여야의 선거 레토릭(Rhetoric)은 변함이 없다. 이번 지방선거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양상은 좀 다르다. 지금은 ‘형식상 민주주의’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1987년, 우리 국민은 직선제 개헌을 얻어내기 위해 군부정권을 상대로 싸워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아울러 그로부터 10년 뒤에는 평화적 정권교체도 성사시켰다. 그러나 도처에서 ‘민주주의가 표류하고 있다’라는 말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역 및 안보 정서 같은 구태의연한 ‘바람(風)’이야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경제적 부를 보장한다는 구실로 유권자를 꼬드기는 저열한 낚시질이 맹위를 떨친다. 기실 지난 2008년 총선에서 ‘뉴타운 개발’이라는 거짓 공약으로 배지 단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긴 그런 기류가 그 전년도 대선에서도 나타났으니, 도덕성과 양심은 무시하고, 지키지도 못할 ‘부자 만들어드릴게요’라는 약속에 휘둘린 유권자들이 다수였다. 

‘형식상 민주주의’를 해부해 보자. 투표를 통한 결과이면 모든 것이 다 정당한가. 이것만 보장하면 과분하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는 선거마다 절대 다수로부터 몰표를 받은 히틀러 같은 독재자의 시대도 정당하다고 해야 한다. 지금 당장 북한에서 절차적 정당성을 보장한 채 국가수반 선출을 위한 직선제 투표를 할 경우 김정일이 실권(失權)할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형식상 민주주의’는 약발이 다 됐다. 이제 우리는 ‘내용적 민주주의’에 눈을 돌려야 한다. 

‘내용적 민주주의’의 요체는 무엇일까. ‘성찰하는 투표’를 말한다. 투표는 심판의 성격이 강할 때 효과가 크다. ‘못하면 갈아 치운다’라는 식의 경고를 국민적 차원에서 한 것이기에 말이다. 사실 선거에서 지면 정치권은 심각한 후폭풍에 시달리게 된다. ‘이대로 지면 다음 선거에서도 진다’는 우려가 증폭되면서 ‘변화는 곧 생존’이라는 의식이 확산될 것이란 이야기이다. 심판받은 쪽의 대오각성과 이에 따른 실질적 개선책이 나오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저들이 궁지에 몰리건 말건 내홍을 겪건 말건 국민만 좋은 것이다. 

좌든 우든 권력을 잡은 세력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자기 보호 본능을 키운다.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그 순서대로 권력을 나눠주게 되고, 야당과 언론, 시민단체의 견제에는 높은 벽을 쌓아 청취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민과도 멀어지게 된다. 이러면 ‘제 멋대로 국정운영’은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거듭하게 된다. 통상 질주하는 차를 제어할 수 있는 장치는 ‘요철(凹凸)’로 불리는 과속방지턱이다. 정치에서 과속방지턱은 선거이다. 

돌아보자. 이명박 정부 들어 우리 국민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말이다. 대화와 타협의 원리가 실종돼 날이면 날마다 반목을 반복하는 정치 현실, 고용불안, 취업난, 고물가 등 서민들로서는 지옥과도 같은 경제 상황, 초등학생부터 서열화함으로써 오도하는 퇴행적인 교육 방향, 산천초목을 삽으로 난자하는 환경 파괴적 4대강 사업, 여기에 더해 언론자유 압살, 노동자 탄압, 약자 홀대 등. 

게다가 병역기피, 탈세, 부동산투기, 뇌물수수, 논문표절 등 시정잡배만도 못한 도덕성을 가진 이들을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며 요직에 발탁하는 ‘사람 보는 눈’하며, 위기만 닥치면 거짓말로 면피하려는 ‘정직성의 상실’은 우려의 수준을 뛰어 넘게 한다. 국민이 위태롭다. 군에 갔다가 물에 잠겨 죽고, 삶의 터전을 잃지 않겠다고 투쟁하다 불에 타 죽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국가의 본령 아닌가. 그러나 백성들은 국가로 인해 스스로의 안위를 걱정한다. 그래서 자문하게 된다. 과연 이 시기가 국민의 ‘심판’이 굳이 필요 없는 천하태평의 기조인지. 


심판론을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 나라 국민은 친절하고 다정해서 권력의 일탈을 두고 보다가 평화적 시위를 통해 우선 매너 있게 경고한다. 2008년의 촛불시위가 그랬다. 단지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 우려만 이었나. ‘친미(親美)면 무조건 옳다’는 단선적 외교 노선, 국민의 반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세의 일천함에 따른 소통의 부재에 대한 경고였다. 그러나 권력으로부터 돌아온 답은 거침없는 폭행, 무도한 기소, 유치한 협박, 가공할 밥줄 끊기의 연발이었다. 

시위의 다음 단계는 표로써 심판하는 것이다. 만약 심판 없이 ‘무승부’ 혹은 ‘승리’의 결과에 직면한다면, 현 정권은 나아지기는커녕, 역대 정권이 그랬듯 일방주의식의 독선적 국정운영에 가속 페달을 밟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번 선거는 좌와 우의 싸움이 아니라고 본다. 국민을 홀대하는 세력에게 쓰디쓴 심판을 할 수 있는 몇 없을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 때 투표를 엉성하게 하면 다음 총선, 즉 2012년 봄을 기약해야 한다. 그때가 2년 뒤이다. 견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 그런 의미에서 2010년 6월 2일, 역사의 요청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청년들이 특히 그렇다. 현 정권은 철저하게 정치적 이익의 유무에 따라 움직인다. 충청 민심이 돌아설 것을 우려해 지키지도 못할 약속까지 얹어 ‘세종시 퍼주기’를 일삼고 있다. 행여 지지기반인 보수 세력이 등돌릴까봐 근거도 없는 ‘천안함 북한 연관설’을 서슴없이 흘려 댄다. 상대가 무서우면 바짝 몸을 낮추는 현 정권의 속성을 보면서 700만에 이르는 20대, 300만이 넘는 대학생이 직면한 ‘무대접’의 현실 또한 눈을 부릅뜨게 된다. 

88만 원의 임금을 받는, 아니 그보다 취업조차 안 되는 백수들이 태반이고, 이러다보니 대학 재학 기간을 늘이려고 A+학점을 F로 바꾸는, 등록금이 없어 밤샘 ‘알바’를 뛰고는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대학생들을 보면, 지금 20대의 문제는 비정상의 극치를 이룬다. 문제는 고용의 질과 양의 개선, 등록금 인상은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이 문제에 관한 기성세대 즉 기업, 대학, 국가는 3자가 아니라 가해자이다. 기업은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는 게을리 한 채 비용대비 효율만 강조하고 있다. 대학은 만만한 재학생 그리고 학부모의 주머니를 털어 내실 대신 불요불급한 외양 치장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를 제어, 감시해야 할 국가는 총체적으로 본 척 만 척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들 가해자들이 대오각성해서 20대의 현실적인 아픔을 해결해줄 것 같은가. 경고가 필요하다. 

경고가 필요하다면 투표를 해야 한다. ‘투표가 우리에게 무슨 유익인가’라고 생각할 때, 좋아할 쪽은 이런 모순된 현실을 조장하거나 방기하는 쪽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 정도는 있지 않는가. 아무리 길어도 한 시간이면 끝날 투표에 참여해 나를 옥죄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수는 없을까. 이렇게 해서 세상이 진보한다면 얼마나 유익한 결과가 되겠는가. 

6.2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절체절명의 선거이다. 소수의 교회권력자들만 그러할 텐데 마치 기독교가 현 이명박 정권과 상당히 유착하는 사이인양 비춰지고 있다. 물론 역사의 변곡점 때마다 힘 있는 자의 편에서 타협하고 굴종했던 지도자들 때문이다. 물론 신자 다수의 침묵도 한 원인이다. 그릇된 정치에 대항하는 위협요소가 되지 못한 탓이 크다. 

한국교회가 정권과 운명을 같이 할 수 있는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아니다’라고 이야기할 기독 지성의 목소리가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선거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교회가 특정 정치 지도자 및 정당의 지지기반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자기 선언이 필요하다. 더불어 불의에 대해서는 관용이 없음을 보여주는 실천 의지도 필요하다. 

사실 정의가 도전받던 시기에 민초 그리스도인의 결기는 시대의 역류를 막았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독립운동의 중심이 됐다. 압축성장기에는 도시 빈민의 마지막 보루가 됐다. 독재 정권기 교회 청년 대학부는 반독재 운동의 구심체가 됐다. 왜냐. 하나님 외에 온전한 이가 없으며, 따라서 모두가 죄인인 사람 사이에는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는 원리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결과물인 것이다.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시대, 이 시대야 말로 기독교의 목소리가 절실하다. 

내용적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않으면 형식적 민주주의도 위협받는다. 세 차례 직선을 치르다 간신히 당선된 박정희는 권력을 잃을 것이 두려워 영구집권 책략인 간선제(유신) 카드를 꺼낸다. 국민적 시험대를 피하겠다는 것은, 심판 받지 않는 권력이 되고자 함이다. 이런 권력이 건강할 수 있겠나. “선거가 너무 많다”(2009년 광복절 경축사), “교육감 비리는 직선제 탓”(2010년 4월 6일,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이라는 이명박 대통령, 이 사람도 감시하지 않을 수 없다. 

선거가 만능은 아니지만, 변화를 불러올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아니 이제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됐다. 아직도 ‘정치가 달라져 봤자지’ 덮어놓고 냉소하는 이런 관념인가. 혹 ‘그 나라 정치의 수준은 곧 유권자의 수준’이라는 지적은 들어봤나. ‘꽁’으로 얻은 휴일에 ‘여가 선용 계획’ 세울 생각하지 말고, 거창한 것 같지만 결국 명실상부한 애국 행위가 될 일을 피하지 말길 바란다. 지금은 엄중한 때이다. 

/ 학원복음화협의회 발행 '물근원을 맑게' 2010년 5월호 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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