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화된 청춘은 없다


청년. 몇 살부터 몇 살까지라는 정의는 없다. 나이만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관용적으로는 20대를 떠올린다. 2010년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20대의 실체를 언급하라면 네 명의 여성을 들게 된다. 꽤 상징적이라 그렇다. 장자연, 박지연 이렇게 고인 두 명 그리고 김예슬과 일명 ‘루저녀’다. 서문은 일전에 발간한 ‘고민하는 청춘, 니들이 희망이다’(미래를소유한사람들 간)에 남긴 이들에 대한 소회를 재구성한다.

 

장자연의 비극은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유명세’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후에 경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인기를 원했을까. 아닐 것이다. 경찰은 “그녀가 유서에다 허위 진술을 했다”고 정리했다. 성 접대까지 했다며 부당한 처우를 유서에 남기고 목숨을 던져 고발했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던 것이다. 생명 ‘따위’로 감히 우리 사회 기득권층의 아성을 흔들 수 없다는 현실의 벽만 확인했던 것이다.

 

그런데 장자연이 선택한 죽음과 관련해 일부 보도는 ‘자신의 피해를 호소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 아니었다’고 전한다. 이유는 이렇다. 장자연은 어머니 제삿날에까지 향응을 요구한 기획사 대표로부터 헤어 나오기 위해 매니저의 요구대로 피해 사례를 편지에 적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의와는 반대되는 방향 즉 편지 내용이 일반에 공개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쪽으로 흐름이 이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실제 장자연은 자존감이 짓밟히는 현실 속에서도 나름 돌파구를 모색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의 대중적 인지도가 보장되면 향응을 피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는, 인기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출연할 무렵, “나도 이제 인기가 있는데 그런 자리에 나가고 싶지 않다”라고 술자리 동석을 요구한 기획사 대표에게 선을 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쉬움이 크다. 정면대응이 자살보다는 덜하면 덜했을 대응 아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이런 오기로 맞섰으면 어땠을까 하는 이야기다. 기왕 피해 사례를 편지에 적을 용기가 있었다면, 좀 더 기운을 차려 얼굴을 내놓고 자기 입으로 세상을 향해 폭로하는 것은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명예훼손 운운하는 지난한 보복성 소송에 휘말리겠지만, ‘잘못된 관행을 깨려 한 용기 있는 여배우’로서 저급한 타협 속에서 얻는 ‘반짝 인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중의 넓고 탄탄한 신망을 얻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고인은 ‘그랬다가는 영원히 이 바닥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상대의 면면을 보면 자신의 배우 인생 하나 쯤 끝장내는 게 식은 죽 먹기보다 어렵지 않은 권력자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장자연에게 새롭고 건강한 비상구를 제시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무력함이 서글프다.

 

관련해서 한 대학생 강연에서 받은 충격적인 경험이다. “당신에게 스폰서가 돼 주겠다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당신에게 하룻밤을 요구한다. 이 한차례의 고통을 겪으면 돈과 명예가 보장된다. 그때엔 거부할 텐가?” ‘솔직하게 답하라’고 몇 차례 당부했다. 그랬더니 조용했다. ‘아니다’가 없었다.

 

다음 주인공도 고인이다. 스물 셋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둔 박지연이라는 무명의 노동자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가장 들어가고 싶어 하는 직장은 다름 아닌 삼성이다. 박지연은 19살에 그 꿈을 이뤘다. 일은 힘들어도 가족들의 기대는 컸다. 마음씨도 고왔다. 인터넷에서의 닉네임은 '내가니별이다'. 누군가의 별이 되겠다는 따뜻한 포부를 가로챈 것은, 그런데 공교롭게도 또 다른 별, 셋을 뜻하는 ‘삼성’이었다. 꿈의 직장이 꿈을 박탈한 셈이다.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던 중 백혈병을 얻었던 노동자는 박지연만이 아니다. 이런 비슷한 산업재해 사망자는 삼성 안에만 여러 명이 있다고 언론은 전한다. 물론 공식적으로 삼성은 부인하지만.

 

박지연에 비하면 장자연은 차라리 행복했다. 세상 사람들이 믿어주건 믿지 않건 응어리진 마음을 편지 속에 다 토해냈으니 말이다. 반면 박지연은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그렇게 죽어갔다. 그 억울함은 유족에게 고스란히 전가됐다. “돈으로 타협하자”는 삼성의 제안 때문이다. 그러나 ‘그냥’은 아니었다. 인권 단체와 언론에 알리지 않는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딸의 시신을 갖고 거래하도록 내몰린 유족의 비감(悲感)은 오죽했을까. 통절한 반성과 재발 방지 약속이라는 마땅한 사회적 책임을 끝내 회피하는 기업. 구조적이며 처참한 비극을 그저 한 사람의 ‘우연한 불행’으로 둔갑시켜 버린 행태. 실망을 넘어 분노를 자아낸다.

 

출강하는 대학의 인문학 관련 강의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러분과 비슷한 나이 아니 동기의 이야기다. 공감이 되는가. 마음에 새겨두라. 남의 아픔에, 또 호소에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대기업 회장들이 그토록 찾고 찾는다는 인문학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울먹였는데. 나만 그러했다. 대부분의 표정은 무덤덤함 그 자체였다.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침묵 기조’는 이 20대 여성의 이야기에 이르러 깨진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남은 믿음으로. (중략)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제품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중략)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고려대 게시판에 붙은 ‘김예슬 선언’의 주요 내용이다. 그 주인공 김예슬 이야기에서였다.

 

‘다른 20대의 강한 동조가 뒤 따르겠다’라고 가늠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김예슬이 켠 심정적 촛불은 그 혼자 타오르다 촛농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김예슬은 지탄받았다. 물론, 지지가 아주 없지는 않았으나 냉소적 다수 앞에서 미력에 불과했다. ‘책을 내야 하는데, 뭔가 홍보수단이 필요했던 것이고, 그것이 자퇴였다’, ‘취업을 위한 승부수 비슷한 거다. 일종의 편법이다’ 이런 반응마저 있었다.

 

‘명문대생’이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가치를 좇아 자아를 찾겠다고 나선 이에게 이토록 야박할 수 있다니 혀를 내두르게 된다. 김예슬에게 지지는커녕 동정조차 보내기 버거워 할 만큼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극한 경계심을 품고 있다. 김예슬과, 김예슬에게 돌 던지는 이들의 차이는 이점에서 미세하다. 불신. 본질은 이것이다.  대학생 활동가로서 쟁점이 되는 현장을 찾아가 자기 목소리를 내왔던 김예슬은 이미 이를 간파한 듯하다. 개인의 자퇴로 종지부를 찍었으니 말이다. 연대도, 투쟁도 없었다.

 

불신의 이면에 도사리는 것이 있다. 바로 ‘경쟁’이다. 2009년 11월, KBS 2TV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한 한 여대생. 그 넷 중 마지막이다. 이 여대생 입에서 나온 ‘키 작은 남자는 루저 즉 패배자’라는 말에 전국이 들썩였다. 논란 초기, 이 여학생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고 있는 점이 마땅치 않았다. 신중치 못한 발언에 대한 꾸짖음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마녀사냥식 비난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처사이다. 그런 식의 발언을 유도해 내 편집 과정에서 증폭시킨 방송사에 더 큰 책임이 있다.

 

정작 논점은 ‘루저’보다는 ‘경쟁력’이라는 표현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여대생은 ‘키 작은 남자’ 이야기를 하며 ‘외모도 경쟁력’이라는 부연을 했다. 경쟁은 ‘공정한 토대’가 전제돼야 한다. 비근한 예로 복싱을 할 때를 보라. 키, 몸무게별로 경쟁할 선수를 분류하지 않던가. 또 형식적으로야 모두에게 기회가 부여된 대학입시가 불공정의 전형으로 비춰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경쟁력 즉 학력이 기실 본인의 노력 보다는 부모의 배경에서 비롯됐다는 점 때문이다. (재력 있는 부모의 자녀가 질 좋은 사교육 기회를 더 많이 얻는다는 점을 보라.) 외모 또한 마찬가지다. 발육과 영양에 좋다는 음식은 비싼 가격이라도 지불하고 섭취하는데다, 때에 따라 성형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특권이 과연 ‘없이 사는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부여되고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각 있는 청춘이라면, 이런 경쟁에 매몰되지 않고 신체 크기를 갖고 사람의 우열을 가르는 유치한 차별구조를 파괴해야 함이 옳지 않을까. 그러나 이 같은 주장에는 철저한 냉소만 받았다. 꽤 상위권인 학생으로부터 ‘경쟁이 없다니요. 그러면 왜 우리는 공부하나요’ 이런 질책을 받아야했다. ‘철모르는 소리’로 격하됐다. 이미 ‘실력’이라는 이름의 학점, 어학실력, 스펙 등으로 차등하는 사회에 내면화, 체질화됐기에 그렇다. 옳음과 그름의 분별이 희미해진 세상, 결국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고 나는 20대에게 ‘희망을 접는다’고 선언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놓친 것이 적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시대를 불문하고 청년은 늘 재단(裁斷)의 대상이었다. 그리스 시대 소크라테스가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어”라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고, "요즘 젊은이들 버릇없다"는 문구가 고대 이집트 로제타석(비석)에 새겨져 있다. ‘싸가지 없다’의 통념은 최근에 와서 ‘개념 없다’는 쪽으로 달라진 것 같다. 다만 평가하는 관행만은 존속한다.

 

이처럼 청춘을 선악 또는 고저로 가르는 기준 또는 근거는 무엇일까. 평가하는 본인의 경험칙이다. 숱한 세월이 흐르는 와중에 청춘의 피상(皮相)은 그때마다 달랐다. 따라서 가늠하는 잣대도 제 각각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같았다. ‘지금 청춘이 우리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안보 관념이 우리만 못하다’, ‘고난에 대처하는 뚝심이 우리만 못하다’, ‘민주주의 저항의식이 우리만 못하다’ 등이다. 학생운동이 퇴조하기 시작할 무렵, 운동권의 막차에 올랐던 1990년대 학번, 바로 우리 세대는, 현시대 대학생들의 정치 무관심 그리고 이기주의, 배금적 사고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무수한 논리를 펴는 것 같지만 성찰해보면 ‘너희 세대는 우리 세대에 열등하다’라는 주제문의 다른 말들이었다. 여기서 또 하나 파악되는 점은, 그 근저에 ‘그때보다 좋아진 삶의 환경 속에 살고 있지 않는가’하는 인식이 굳게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보다 유복하고 안온한 환경 속에서 이들은 자라가고 있는 것일까. 과거와 다른, 나아진 인터넷 환경, 편리한 학업 인프라, 다양한 직군 출현 등 애써 강조할 구실은 많다. 그래서 한층 개선된 환경인 줄 알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전 세대에게 익숙하지 않은 너울이 현 청춘의 일상을 덮친 사실을 절절이 지각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이 부분은 좀 더 세부적으로, 지엽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대학생 381명을 대상으로 ‘대학생 빚 현황’에 대해 조사한 결과, 전체의 59.8%가 ‘현재 빚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이 진 빚의 평균은 1579만 원으로 집계됐다. 또 금융감독원 자료에는 총자산 100억 원 이상 대부업체 40곳에서 대학생에게 대출한 규모가 6월말 현재 47,945건의 대출 잔액이 794억5800만 원이라고 답했다. 대학생 대다수가 빚쟁이이며, 이 가운데 상당수가 대부업체에까지 문을 두드렸다는 점이다. 일부라도 제때 갚지 못할 경우 개인신용정보평가사에 신용불량자로 등록되고, 아울러 취업에 대한 그로부터 물거품이 된다. 과거에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이는 80% 이상이 대학진학을 하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1980년대 20%대, 1990년대 30%대에 불과했다.) 대학과 학생정원도 대폭 늘어난 탓이지만, 그 이면에는 대학졸업장없으면 사람취급 안 하는 사회 풍토에서 비롯된다. 청년층 취업자 중 고졸자의 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대졸자의 임금지수는 2007년 141에서 올해 150으로 더 벌어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들어간 대학에서는 졸업장 한 장 발급하는 대가로 4년간 3000만 원 이상을 뜯어간다. (2011년도 사립대 등록금 평균 768만6000 원이라는 점에서.) 1980년대 대략 65만 원, 1990년대 150만~200만 원 수준, 2000년대 300~400만 원 수준임을 따져 본다면 일반 봉급생활자의 월 급여를 크게 상회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지만, 빚을 쓸 정도까지는 아니었음을 가늠하게 된다.

 

만난(萬難)을 극복하고 대학을 나온들 취업 일선에서 또 다른 좌절감을 겪게 된다. 한국의 청년실업률은 명목상 7.6%로 32만 명 정도다. 10명 중에 한 명도 노는 이들이 없다고 하니 낮은 편이라 할 수 있겠으나 이런 통계는 ‘현실과 따로 논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기실 취업을 포기한 사람이나 군 입대자와 재학생, 취업재수생 총합 40만 명을 빼고 집계한 점, 아울러 단시간 근로자 즉 ‘아르바이트’직을 하는 이, 구직을 단념하는 이도 ‘청년실업’에서 예외가 된다는 점이 크다. (이상은 2011년 7월 현재) 따라서 이들 일 없는 이들을 다 합쳤을 때에 집계되는 100만을 ‘실업인구’로 보는 게 가장 적실할 것이다. 취업한 이들은 또 어떤가. 333만4000명 가운데 101만4000명이 비정규직으로 집계됐다. 비율로는 30.4%. (2011년 3월 현재) 정규직 비정규직의 성격도 불분명했던 ‘평생직장’ 시대에 살던 이들로서는 이런 환경에 낯설다.

 

‘이런 전 방위적 경제적 압박을 등에 짊어진 경험 없이 이 세대를 비판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 앞에 서게 된다. 지난 해 20대를 위한 카운슬링 서적 ‘청춘 매뉴얼 제작소’를 낸 프로레슬러 김남훈 씨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거론했다. ‘환경에 강한 종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환경에 민감한 종이 살아남는다’는. 사방을 둘러싼 환경을 불굴의 의지로 뚫고 나가는 자가 아닌, 환경에 적응하는 자가 결국에는 생존한다는 말이다. 20대에게 이런 사회 구조적 난맥상을 개선해주는 성의를 보인 후에 매를 들어도 들어야 한다는 설명으로 나는 알아들었다.

 

이걸 이미 간파한 것 같은 기성세대는 대학의 직업기관화, 고액 등록금 및 청년 고용 문제에 대한 무성의한 대책으로 일관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학생만 생각하면 두통약을 찾을 정도로 여러분이 무서워져야 한다”는 목소리를 거듭 내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다. 그네들의 고충을 헤아리려 해도 여기서 다시 주저하게 된다. 투쟁과 저항이 낡은 시대의 전유물인가. 지금은 그런 것이 필요 없을 정도로 사회 경제적으로 균등해진 기회, 품격 높은 복지의 틀이 완성됐다는 말인가.

 

이 지점에서 좀 더 거시적인 ‘청춘의 형성’을 살피려 했다. 선배 세대는 어떤 선험(先驗)을 했기에 현재의 청춘과 대조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설파하려 했을까. 단초는 그 세대의 시대 현상이었다. 우리 현대사는 놀랍게도 무지르듯 10년 단위로 세대를 구분할 여지가 많았다. 10년 첫 해 또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해에 현대사의 핵심 사건이 집중됐기에 그렇다. 1950년 한국전쟁, 1960년 4.19 그러나 이듬해 획책된 5.16, 1971년 김대중에 90만여 표 차이로 신승(辛勝)해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가 이듬 해 영구집권을 획책하기 위해 밀어붙인 유신 체제, 1980년 5.18 학살한 시민의 시신을 딛고 일어선 신군부, 1990년 사회주의 체제 붕괴 및 민자당 창당으로 인해 보수-진보 대결구도 고착, 2000년대 6.15 남북공동선언에 따른 한반도 불확실성 극복 및 외환위기로 인한 신자유주의 발호가 그렇다. 이들 사건은 대체로 그 10년의 시대정신 즉 빈곤, 재건, 독재, 민주화, 탈이념, 신자유주의를 상징했다. 여기서 경험이 나오고 권위가 배태된다. 대립각을 세우는 양대 주체, 즉 선배 세대는 아버지 어머니, 후배 세대는 아들딸이었다. 그들에게 평균 연령차 30년을 대입해 정리하니 이런 그림이 그려졌다. (물론 세대구성원 모두가 같은 양태의, 균질화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외적으로 지사적 풍모를 지닌 혹은 이보다 더 퇴행적인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평균 지점에서 어림잡은 것이다.)

 

우선 1930년대 생들, 한국전쟁을 겪을 무렵 전장에 차출됐고 압축성장기에 사회주도층 열반에 선다. 그 어떤 세대보다 자기 확신이 강하다. 정계에서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이회창 자유선진당 전 대표, 교계에서는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김홍도 금란교회 원로목사가 이 경우다. 애국보수를 자임하며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우리가 있었다’며 거리를 활보하는 선글라스와 군복 차림의 여러 ‘어버이’들 상당수도 그럴 것이다. 이들 확신체계는 주로 반공, 친미, 보수이며, 이를 토대로 결정된 관념은 종교적 신조에 가깝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세대에게서 역대 가장 저항이 거셌던 386 세대가 나왔다. 부모세대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보는 이유다.

 

1940년대 생들, 20대에 이르러 4.19를 경험했고, 미국의 히피문화, 프랑스의 68혁명의 영향을 입으며 정의와 자유를 외쳤다. 이렇게 사회구조적 변화를 추동하려 했지만 훗날 이를 부질없는 행동으로 격하한다. 분단현실 아래 군사정권에 압도돼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터다. 아울러 압축성장이 가져다 준 혜택은 달고 달았다. 폭등하는 부동산, 바뀌는 팔자. 법과 정의의 규제선 따위는 허울에 불과하다 판단한 것일까. 불의와 비리에 관대했다.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제적 동물로 전락한 양상이었다. 이 노정에 일치하는 상징적 인물은 다름 아닌 1941년생 이명박 대통령이 아닐까. 이들에게서 나온 세대가 1970년대다. 앞선 세대와는 달리 이들은 칼라TV로 상징되는 다양 다각화된 대중문화에 길들어져 갔고 민주화운동이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지는 정치상황의 선진화를 지켜봤다. 획일적이고 단선적인 권위와 지침은 통용되지 않는다.

 

1950년대 생도 비슷하다. 유신시대 즉 1970년대에 대학생으로 지냈다. 억압과 절망의 시기, ‘아침이슬’을 벗하며 분노를 삭였다. 그러다보니 주역이 되지는 못했어도, 거리로 뛰쳐나온 아랫세대 386의 민주화 운동에 넥타이 맨 박수부대로나마 조연 역할을 했다. 다만 3저 호황기(저유가, 저금리, 저환율)였던 1980년대 결혼 및 출산을 했던 터라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외환위기를 만나 집단 해고의 여파를 입게 되고, 급격한 경제적 쇠락을 경험한다. 낡은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졌던 터라 아랫세대에게 강요와 굴종을 요구하지는 않았던 이들 세대, 그러나 실직과 생계수단 부재의 상황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노출하고 만다. 자녀들의 가치관 속에 ‘돈’을 우선적인 가치로 새겼다. 이 란에서 도마 위에 올린 청년들이 바로 1980년대 생 이들이다.

 

사실 정형화된 청춘은 없다. 특히 수시로 정권이 교체되고, 한 회사가 20년 가기 힘든 경영 환경에, 1년 안에도 트렌드가 틈만 나면 개변하는 역동적인 이 나라의 사회구조라면 더욱 말이다. 따라서 ‘청춘 = 저항’이라는 도식은 단선적이다. 그러나 청춘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것 역시 저항이다. 선배세대의 ‘내가 그 때에는...’로 시작하는 주어구는 실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그렇기에 현 청춘에게 투영하고 싶은 희망사항에 다름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 청춘은 절망의 연속이었다. 해방 이후 이념대결 공간에서 좌와 우로 편 갈라 살상을 피하지 않았던 극단의 1940년대, 그 갈등이 국가체제로 확대돼 끝내 전쟁으로 비화된 1950년대, 4.19와 6.3을 끝내 미완의 항쟁 아니 실패한 항쟁으로 끝내버린 쿠데타 정권 주도의 1960년대, 헌법상 내란에 가까운 유신으로 내내 숨죽여야 했던 1970년대, 직선제 관철이라는 반짝 성과를 내고 반 년 뒤 신군부 후계자에게 나라를 넘기는 파행을 자아낸 1980년대, 탈냉전 이후 갈피를 못 잡다가 연세대 사태로 끝내 명을 다한 1990년대, 그리고 존재감조차 없었던 2000년대. 학생운동은 이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로 물러나는 듯 했다.

 

그런데 지각 있는 학생들이 사회구조적으로밖에 풀 수 없다며 고액 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해 거리로 뛰쳐나왔다. 말 그대로 자생적 출현이라 해야 옳다. 절박한 심정에서 택한 연대지만 빛나지 않을 수 없는 결행이다. 이들에게 승리의 추억을 안겨주고 싶다. 뜻을 갖고 응전했더니 역사로부터 화답이 오더라는 공식을 인식체계화하고 싶다. 청년의 청년 됨. 그 세대만의 몫이 아닌 세대 간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다고 전술했다. 따라서 선배 세대의 조력은 필수가 아닐 수 없다. 청년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책임한 야유와 질책만이어서는 안 되리라. 반값 등록금 요구에 우리 사회가 어떻게 대꾸할 것인가. 2011년 청년의 인상을 결정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 월간 '기독교사상' 201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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