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깡패같은 국가원수, 카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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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청년장교 시절 쿠데타로 집권해 고희에 이르도록 리비아를 통치하고 있는 세계 최장기 집권자, 카다피. 리비아 청년장교 그룹인 자유장교단을 이끌어 쿠데타를 일으키고는, 외국 석유회사들을 추방한 뒤 석유국유화를 단행하고, 반서방ㆍ반미 노선을 내걸어 미군 기지를 철수시키며 세계 앞에 그 이름을 떨쳤다.

당시만 해도 쿠데타의 동인(動因)을 몇몇 정치군인의 순간의 권력욕으로 폄하하는 이들은 없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국왕에 대한 분노, 서구식 의회와 정당을 부정하고 대중 직접민주주의, 완전 평등주의, 임금노동 폐지를 주장하며 이슬람사회주의 국가를 세우려던 카다피의 철학에 대한 공감대가 기층 민중 사이에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카다피는 그 꿈을 이루었을까. 자신은 여전히 “리비아의 발전을 이끌어 왔으며 혁명의 지도자이며 혁명은 죽을 때까지 희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권좌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입에서만은 ‘혁명’의 기치는 건재하다.

실상을 짚어보자. 한국의 건설사들이 20~30년 전부터 리비아에 진출하는 직원들을 상대로 '불문율'을 교육시킨단다. 그중 우선된 것은 '카다피'라는 단어는 입 밖으로 내지 않을수록 좋다는 것. 설령 좋은 뜻으로 얘기했다 해도 현지에서 받아들이는 뉘앙스가 다를 수 있고, 혹 '신고'가 될 경우 경찰 조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게 건설사들의 걱정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굳이 카다피를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가 선생'이라고 불렀다. 일설에는 '카'도 위험하니 '가'로 바꿨다는 말도 있다. 우상화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격화를 하는 셈이다.

2009년 9월 유엔총회에 참석한 카다피 이야기는 지금도 화제다. ‘아프리카 왕 중 왕’이라는 거창한 소개를 받으며 연단에 오르더니 무려 96분에 걸쳐 장광설을 쏟아냈다. 통상 정상급 지도자의 15분 정도 발언기회가 부여되는데 이를 무시해버린 것이다. (물론 카다피의 기록은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 다음이다. 카스트로는 4시간29분 기록이라는 기염을 발산했다.)

나와서 한 이야기도 엽기였다. 단상에 놓인 유엔헌장을 찢어버리며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이 나머지 나라들을 2등 국가로 경멸하는 만큼 테러이사회로 불러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밖에 “신종플루는 군사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신종생물무기 아니냐.” “‘아프리카의 아들’ 오바마 대통령은 영구 집권해야 한다.” “암살당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재조사를 해야 한다.” “유엔본부를 리비아로 옮기자.” 이런 황당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제기했다. (여담이다. 유엔본부 이전.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제안 아닌가? 허경영 씨가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것이다. 판문점으로 옮기자는 것인데.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와 합의한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믿거나 말거나.)

아랍어로 된 카다피의 일장 연설을 통역하던 동시통역사는 기진맥진해져 도중에 교체됐다. 회의장에 있던 사람들 절반은 졸았다고 하고.

카다피의 안하무인은 ‘유서’ 깊다. 196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얼마 뒤, 천막 비슷한 흙담 집무실을 일부러 만들고는 문을 낮췄다. 이렇게 되니 자기를 만나러 오는 서방 외교사절들은 입구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 장면을 사진에 담으면 서방세계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조아린다는 상징적인 ‘인증’이 되고.

한편 카다피는 부족 전통에 따라 유엔총회장 근방에서 천막을 깔고 자려 했다. 2007년 파리, 2009년 이탈리아를 국빈 자격으로 갔을 때에 그랬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욕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반대했기에 그렇다. 사실 미국 사람에게 카다피는 원수(怨讐)나 다름없다. 1988년 270명이 탄 팬암 여객기를 폭파하라고 지시한 배후가 카다피였기에 그렇다. 결국 리비아 대사관에 급조한 천막 하나로 만족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카다피, 불같이 화를 냈다는 후문도 있다. “나를 이렇게 대접해? 핵 원료인 농축 우라늄을 러시아에 반환할 거야”라고 발끈했다는 것이다.

카다피가 부족 전통보다는 공포증 때문에 천막에서 잔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가 작년 5월에 세계 정상들의 독특한 공포증을 소개했다. 여기서 소개된 카다피의 증상은 폐소 공포증이다. 이는 꼭 닫힌 곳에 있으면 두려움에 빠지는 강박 신경증을 말한다.

(이야기 나온 김에 다른 지도자의 사례도 짚어보겠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1976년 헬리콥터 사고로 크게 다친 뒤 비행에 대한 심각한 공포를 갖게 됐다고 한다. 전용열차를 타고 9300㎞를 달려 모스크바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경호를 위해 최대 90개의 객차가 붙었다고 한다. 지도자의 동물 무서워하는 습성도 있다. 어릴 때 개에 물렸던 메르켈 독일 총리의 개 공포증이 그렇다. 그걸 알고 푸틴 러시아 총리는 정상 간 대화 자리에 사냥개를 회담장에 데려오기도 했다. 심리전을 하려한 거다. 말에 떨어진 경험이 있는 부시 미국 대통령, 절대 말에 오르지 않는다고 한다. 미신을 맹신하는 미얀마 군정 최고지도자인 탄 슈에 이야기가 이중 가장 압권이다. 90이라는 숫자가 더 운이 좋다는 이유로 100차트 지폐 대신 90차트 지폐를 만들었다. 천 원, 만 원이 아니라 천 원, 9천 원 이렇게 지폐를 만들었다는 것. 또 수도를 정글로 옮겨야 무사하다는 점성술사 의견을 그대로 따르는 기행을 연출하기도 했다.)

카다피가 꿈꾼 또 표방한 이념은 사회주의이다. 그러나 42년 후 실상은 절대왕정이다. 이제는 오만과 독선으로 똘똘 뭉쳤다. 이러다보니 정권의 버팀목이었던 군과 공무원은 난파선처럼 이탈 행렬을 이어간다. 중국·인도·말레이시아·방글라데시 주재 외교관들에 이어 법무장관, 내무장관도 사퇴했다.

카다피는 본인에 대한 저항은 무조건 대의에 반하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성역화한다. 한 때 자기가 이끈 혁명의 동력이었던 민중의 봉기를 ‘쥐떼’의 소동으로 폄하한다. 그리고는 “총 한 발 남을 때까지 맞서겠다”며 겁박한다. 구제 및 치유불능의 독재 환각 상태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총칼로 거스르려 해도 정권 붕괴는 시간문제이다.

성역 없는 민주화의 대세, 이 바람은 아시아로 몰려오고 있다. 걱정되는 쪽은 어떻게든 막아보려 부산하게 책략을 도모하는데, 누군가는 남의 일인 듯 여긴다. 카다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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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cm 최단신 대통령 박정희

“키 180cm가 안 되는 남자는 루저(Loser)라고 생각합니다.”

한 여대생의 2009년 가을 이 발언 때문에 촉발된 파문은 잦아들었다. 그러나 키 작은 남자들이 받은 상처는 여전한 듯하다. 그래서 따져봤다. ‘역대 가장 키 작았던 대통령’은 혹시 정치적 ‘루저’ 즉 ‘패배자’였는지.

전 현직 대통령의 키를 알아보자. 박정희 165, 최규하 180, 노태우 175, 김영삼 168, 김대중 173, 노무현 전 대통령은 168cm이었고, 현 이명박 대통령은 173cm이었다. (이승만, 윤보선,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것은 확인이 어려웠다.)

그 여대생의 말대로라면 최규하 전 대통령을 뺀 나머지 전 현직 대통령 모두 ‘루저’인 셈이다. 참고로 최단신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탤런트 이순재 씨와 김태희 씨가 같은 키이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발언이 나왔던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서 또 다른 출연 여대생은 "아무리 잘생겨도 165cm 장동건은 싫다"고 했다.

그렇다면 육영수 여사는 남자 키를 그리 따지지 않았던 것일까. 게다가 그녀는 남편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 키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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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165cm도 상당히 커진 키였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고등학교 쯤 됐을 15살 때인 1932년에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는데 이때 키는 135.8cm이었다. 몸무게는 30㎏, 가슴둘레는 66.3㎝이었다.

보건복지부의 2005년 국민건강영양조사결과를 보면, 135cm에, 30kg정도면 초등학교 3학년 즉 9살 정도의 평균치이다. 못 먹고 못 살던 시대여서 그럴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때에도 그 정도면 왜소한 축에 끼었다.

가난 때문일 것이다. 백남의 여사는 45세의 나이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임신했다고 한다. ‘원치 않은 임신’이었다. 게다가 그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수와 누나가 임신한 상태였다. 자식뻘 되는 이들과 함께 몸을 풀게 될 처지가 된 어머니, 뱃속 아기를 지우려 했다. 간장을 한 사발 마시고, 섬돌에서 뛰어내려보기도 하고, 장작더미 위에서 곤두박질치고, 일부러 물레방아에 스스로 깔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급기야 애 낳으면 이불에 돌돌 싸서 아궁이에 버릴 생각도 했다. 도저히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결국 태어났다. 사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버지와 형들은 기골이 장대했다. 하지만 태아 시절에 겪은 시련 탓인지 아니면 어머니가 노산에 모유가 나오지 않아 밥물에 곶감을 넣어 끓인 죽을 먹고 자라서인지 왜소하고 까만 얼굴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작은 신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큰 콤플렉스였다.

흔히들 ‘키 크면 싱겁다’라고 말하지 않나?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는 키 큰 친구가 있었다. 훗날 <부산일보> 사장을 하게 된 왕학수 씨이다. 왕학수 씨는 지금의 초등학교격인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야, 도석재라는 애 있잖아, 우리 반에서 가장 키 작은 애, 걔는 딴 데서 온 아이지만 너하고 키가 비슷해서 서로 처지를 잘 알겠다”라고 말이다. 은근히 키 작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꼰 것이다.

키 큰 사람은 이거 모른다. 얼마나 듣기 불편한 말인지. 아니나 다를까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노했다고 한다.  "일마가 이기, 무슨 소리 할라카는기고?" 그러면서 확 노려보는데, 이 매서운 눈매에 왕학수 씨가 오줌을 지릴 뻔 했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평소에 왕학수가 걸어오는 웬만한 농담에도 씩 웃고 마는 편이지만 자신의 키와 관련된 농담에 대해서만은 충동적인 적대감을 표시하는 버릇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왕학수는 "하하하… 농담이다, 농담. 니캉 내캉 농담도 못할 사이인가"라고 얼버무렸다고 한다.

키 작은 사람들이 집념이 있다는 얘기도 많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애도 그러했다.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을 소개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육군사관학교와 같은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고 한다. 한 번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떨어졌는데, 또 떨어질 수 없어서인지, 두 번째 지원할 때 이런 충성편지도 동봉했다고 한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충성편지의 충성강도가 너무 셌던가. 현지 신문에 실리기까지 했다. 강요받았던 또는 생계형이었던 친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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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두고 어떤 보수신문 논설위원이 했던 평가이다. “일제 35년은 긴 세월이었다. 합병 초만 해도 국민적 저항이 있었으나 20년, 30년이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일제는 저항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고 살려면 순응해야 했다. 그래서 판사도 되고 국방헌금도 내고 일제를 칭송하기도 했다.” 의도적으로 민족을 배반했다기보다 시대에 순응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불과 9개월 차이로 태어난 장준하 선생 같은 분은 그 시절 독립운동을 했다. 질 낮은 합리화의 다름 아니다. 이렇게 방향성과는 무관하게, 목적한 바를 이루려는 강렬한 의지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있었던 것이다.

훗날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 ‘독재자’라는 오명을 떼어내지 못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짚어봐야 한다. ‘키 작은 지도자’, ‘독재자’하면 바로 프랑스의 나폴레옹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어린 시절 박정희의 영웅은 나폴레옹이었다. 이른바 ‘박정희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는 "박정희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나폴레옹 전기였다. 이 전기를 통해서 소년은 권력, 군대, 정복, 지배, 남자다움을 동경하게 된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조갑제 씨는 박정희와 나폴레옹의 공통점을 몇 가지 들었다. 어린 시절의 병정놀이를 좋아했다, 작은 키였다(그런데 나폴레옹이 좀 더 컸다. 167cm이었다), 사관학교 교육을 받았다, 포병 출신이다, 이혼 경력이 있다, 쿠데타로 집권했다,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 이런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 나이에 문경 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었지? 박정희는 이 작은 산간 학교에 40년까지 3년간 재직했는데, 그때 하숙방에 나폴레옹의 초상화 사진을 걸어둘 정도였다고 한다. 이른바 ‘큰 바위 얼굴’이었던 셈이다.

동경한 정도가 아니었다. 박정희는 자기가 하던 일, 즉 선생님 일을 싫어했다. 누나 박재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 무렵 "죽어도 선생질 더 못 해먹겠다"라고 말하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에게 나폴레옹의 길은 유일하게 일본의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의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탈출구는 잘못된 것이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만약 그가 ‘군인의 길’을 독립군에서 걸었다면, 어쩌면 북한과의 소모적인 체제경쟁을 안 해도 됐었고, 통치기반이 미약한 점이 걱정돼 권력기관을 동원해 독재 정치를 펴지 않았을 것이다.)

국내 최초로 키높이 구두를 쓴 사람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2004년 5월 KBS ‘VJ특공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주 찾던 구두점 소개했다. 여기서 50년째 운영 중인 조충남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해 이렇게 언급했다. “박 전 대통령이 키가 작으셔서 10mm를 높인 것은 그 당시 비밀이었다. 국가원수 자리에 올라도, 연륜이 깊어도, 키에 대한 고민은 여전했던 것 같다.

‘작은 키’와 무관하지 않을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이 한국 현대사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 줬을까. 잿더미였던 나라가 반세기만에 세계 15위권 안에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박정희 정권 시절의 성장역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압축 성장으로써 재벌만 잘 먹고 잘 살게 됐던 왜곡된 성장’으로 평가하며 ‘이것이 외환위기를 불러왔다. 따라서 토대부터 잘못됐다’는 비판도 있다. 나는 후자에 무게를 싣는다. 사실 사상 초유의 저임금과 복지, 압살된 민주주의 현실을 감내하며 조국에 희생한 민중이 받아야 할 영광을 권력자 한 사람이 편취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작은 키로 ‘대성’한 사람들도 따져보자. 한국 경제의 거목인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대한항공의 창업자 고 조중훈 회장도, 한때 서태지, 이승환, 이병헌도 신장과는 상관없이 사랑을 받는 연예인이다. 단신 남자의 성공 비결을 이렇게 풀이하는 이들도 있다. 머리를 잘 쓴다는 것이다. 몸에서 느끼는 열세를 두뇌로 만회하려 한다는 것이다. 두뇌뿐인가. 치열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을 이루기 위해 더 용기 있게, 강한 집념으로 목표 달성을 위해 경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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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여론이 적지 않다. 2009년 8월에 나온 한 통계를 보면, 역대 대통령 중 국가발전에 가장 기여한 인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꼽혔다는 내용이 있다. 절반 이상 말이다. 이 통계만 보면 ‘키 작은 사람은 루저’라는 평가는 전직 대통령의 경우 맞지 않는다 하겠다.

장신 대통령은 어떨까. 루저인가 위너인가. 조선일보가 2005년 한국대통령평가위원회가 실시한 역대 대통령 평가 결과를 실었는데, 최장신인 최규하 전 대통령이 종합평점 32.94점으로 평가 대상 8명 중 최하위였다고 한다. 재임기간이 짧은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극상을 당하고 무력하게 물러난 뒤, 비극의 시대의 감춰진 진실을 알려줄, 책임 있는 증언마저 피했던 최규하 전 대통령, ‘루저’라는 야박한 평가는 좀 이를지 몰라도 적어도 ‘위너’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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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 정치'의 달인 진복기 허경영

대한민국 헌정사 정사(正史)에 이름 몇 번 남긴 정도지만, 야사(野史)에는 길이 남을 정치인들을 만나보자. ‘엽기 정치’의 달인인 사람들이다. 헌정사라고 범위를 넓게 잡았으니 과거 그리고 오늘의 인물을 망라한다는 의미로 파악했으리라 생각한다. 민주공화당 허경영 총재 그리고 훗날 기독성민당이 된 정의당 진복기 총재. 이 두 사람이 주인공이다.

우선 진복기 총재부터 만나보자. 진복기 총재하면 세 가지 기억을 떠올린다. 우선 첫 번째, 카이젤 수염이다. 카이젤 수염하면 독일 제국 마지막 황제인 빌헬름2세의 전매특허이었다. 정치도 상징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최초로 각성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그는 정치 입문에 뜻을 둔 때, 바로 1963년부터 카이젤 수염을 하고 다녔다. ‘국민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목적’임을 밝혔다고 하니, 꽤 성공한 셈이다. 두 번째, 동메달이다. 1971년 대선에서 3등을 한 것이다. 세 번째, 단골 대선 출마자라는 점이다.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있던 1971, 1987, 1992, 1997년이면 당을 만들어 출마를 하거나 의사를 밝혔다.

앞서 '동메달'을 언급했다. 대선 3등, 그거 아무나 하나. 1987년 개헌 이후에 3등 후보는 김대중, 정주영, 이인제, 권영길, 이회창 그야말로 쟁쟁한 사람들 아닌가. 물론 '진복기의 3등'에는 거품이 끼어있다. 2등과의 차이가 엄청났던 것이다. 당시 1등은 634만 표를 얻은 박정희 후보. 2등은 539만 표를 얻어 100만 표 이내까지 쫓아갔던 김대중 후보였다. 그리고 3등 진복기 총재는 12만 표를 얻었다. 1등과 2등이 100만 표 이내였지만, 2등과 3등은 무려 500만 표 이상 표차가 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3등은 3등이었다. 진복기 총재도 그랬다. “표차가 중요한 게 아니다. 3등이 중요하다”라고.

큰소리 뻥뻥 치는 것을 보면 허경영 총재와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의 공통점 다섯 가지로 묶어서 이야기해보겠다.

첫째, ‘큰소리 뻥뻥’이다. 진복기 총재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대선을 끝으로 더 이상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못하도록 유신 개헌을 시도하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나 진복기가 무서워서 선거를 안 하려 하는 것이다”라며 '독심술'을 만방에 과시했다. 허경영 총재는 어떤가. 대선 후에 검찰이 선거법 위반과 명예훼손 혐의로 수사 받게 되자, “내 인기가 높아지는 것에 대해 (우려한 나머지, 이명박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탄압 한다” “나는 구치소 안에서도 ‘염파’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다. 날 음해하는 사람, 가만히 안 두겠다”며 큰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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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황당 공약’이다. 허경영 총재는 2007년 대선에서 결혼하면 수당 1억 원 지급, 출산수당은 3000만 원 지급 이런 공약을 제시했다. 과거엔 러시아 바이칼 호수를 영구 임대하는 공약도 제시했다. 과거 공약이 더 황당하다. 당선 즉시 국회의원 전원을 구속하고, 불효자는 사형에 처하며, 전국을 4개도로 축소해서 지역감정을 없애겠다고 했다. 또 징병제도를 모병제도로 바꾸고 복무 기간을 6개월로 단축하며, 국방 공백은 북한에 미군과 유엔군을 주둔시킴으로써 해결하겠다고도 했고. 그밖에 한라산 백록담에 물을 채워 양수발전소를 건설한다는 내용도 있다. 당연히 뒤 따랐을 ‘그게 가능하겠는가’라는 기자 질문은 ‘방법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한다면 하는 거다’로 일축됐다.

진복기 총재의 황당공약 차례이다. 그때는 ‘뭘 어떻게 해주겠다’보다는 ‘투표 부정이 없도록 하겠다’가 우선된 공약이었나 보다. 진복기 총재는 “투표소에서 바로 개표하겠다”, “과반수를 얻지 못하면, 3명의 후보로 결선투표 하겠다”라는 공약이었다. 물론 진복기 총재처럼 ‘부자 만들어주겠다’는 공약도 없지 않았다. “신안 앞바다에 보물이 있다. 이걸 캐내서 여러분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드리겠다”라고 했었다. 아, 물론 이것도 있었다. “대통령이 되면 전쟁을 일으켜 북진 통일을 성사시키겠다”라는 점이다. 지금이야 황당하지만,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했던 그 시절에는 그리 놀랍지 않은 수사(修辭)였다.

세 번째, ‘자수성가 스토리’이다. 진복기 총재하면 매우 가난했던 후보로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수유동 빨래터 산비탈 대지 50평 위에 10평짜리 집 두 채. 이곳은 진복기 총재의 집이자 진복기 총재가 이끄는 당의 중앙 당사였다. 그나마 선거에 출마하느라, 다 팔고서는, 이 돈으로 선거유세 기간, 여인숙이나 2류 여관을 전전하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수행원은 둘째, 셋째 아들. 여관비가 떨어져 둘째가 인질로 잡히기도 했다. 목포 유세에 가서는 ‘배가 고파 연설을 못 하겠다’고 하니까 거기 모인 사람들,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그때에는 각 대선 후보마다 나라에서 경호원을 붙여줬는데, 말이 좋아 경호원이지 실은 감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감시에는 많은 땀과 피로가 필요했다. 차가 못 올라가는 그 언덕길을 오르내리려 하니 얼마나 고생이겠나. 게다가 차 없이 버스로만 이동하는 후보를 따라잡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진복기 총재, 독지가로부터 선거자금을 받을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호원이 감시하는 것 같아서 다방에서 차 마시게 만들고, 본인은 화장실 통로를 이용해 버스를 타고 달아다나서 돈 받아온 적도 있다고. 차떼기가 아닌 차타고 떼어놓기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은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어려웠던 과거' 내러티브는 허경영 총재의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진복기 총재는 일방적 자기주장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허경영 총재는 ‘이걸 믿어야 하나’라는 의심을 품게 한다. 중랑교 다리 밑 가마니 움막에서 태어나 부리부리한 눈에 반한 이병철 삼성 회장이 자신을 양자로 받아들였고, 그 이병철 회장에게 무노조 경영의 노하우를 전수했으며, 훗날 박정희 대통령의 비밀 보좌관이 돼 새마을운동, 방송통신대학, 반도체 산업 육성 아이디어를 제안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법원은 “확인할 길이 없다”며 허위로 결론을 내렸지만, 허경영 총재는 끝까지 “비밀 보좌관이 자신이 하는 일에 흔적을 남기겠느냐”며 사실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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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나르시시즘’이다. 이른바 ‘자기 과신’이다. 아이큐 430, 공중부양, 축지법, 외계인과의 교신 심지어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뇌를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허경영 총재가 역설하는 자신의 초능력은 무한대에 이른다. 진복기 총재도 마찬가지. 자신이 술, 담배를 전혀 안 했기 때문에 건강하고 100살까지 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건 신의 계시였다는 주장이다.

나름 근거도 있었다. 1975년 9월 어느 날 새벽기도를 하고 나오는데 하얀 구렁이가 두꺼비를 입에 넣고 먹고 있는 찰라, 그 구렁이를 잡아 뱀술을 만들어 먹었는데 이것 때문에 더욱 건강해졌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30년은 더 살아서 언젠간 꼭 청와대 주인이 될 거라는 이야기였다. '100세 장수' 주장은 69세였던 1986년에 했는데, 30년은 아니지만 그로부터 14년은 유효했다. 14년 후인 2000년. 진복기 씨가 세상을 떠나 고인이 됐다는 얘기이다.

다섯 번째, ‘생활의 달인’이다. 정치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유력후보도 아닌데 이 돈, 어디서 구했을까. '몸으로 때운다'는 말이 새롭다. 이 두 사람은 특유의 ‘강인한 생활력’이 있었다. 허경영 총재, 정치 비수기인 때에는 무엇으로 살았을까. 2009년 ‘내 눈을 바라봐 너는 건강해지고’ 이런 가사의 노래 ‘콜미’를 발표했다. ‘허본좌 허경영’이라는 싱글 2집도 발표했다. 본인의 연예 활동을 위해 기획사도 만들었다. 본인이 유일한 소속 가수지만. 기획사 이름은 ‘본좌엔터테인먼트’이다. 매니저이면서 기획사 사장은 공화당 사무총장이 맡았다.

진복기 총재는 어떻게 돈을 모았을까. 인터넷이 없고, 그렇다고 연예활동을 하자니 당시엔 정치와 연예 활동의 간극은 워낙 컸기에 방책은 고전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근세 30년사’, ‘건강관리전서’라는 책을 만들어 그걸 외판하면서 돈을 모은 것이다. 유신 헌법 제정 이후, 즉 정치활동이 사실상 묶였을 시기에는 목사로서 전국 방방곡곡 교회의 부흥회 강사로 나서 생계를 유지했다.

이 두 사람, 여러 사람의 냉대를 딛고 자기만의 길을 걸었다는 점은 가상하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정치활동은 우리 정치의 어두운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이야기도 많다. 기성 정치에 대한 혐오감, 이런 것이 이 두 엽기 후보에 대한 환호와 지지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실 기성 후보들도 ‘국민들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며 지키지도 못할 약속, 뻥뻥 터뜨린다. 두 후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너희나 이 사람들이나 다를 바 없다’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지막 여섯 번째이다. 종교심과 정치적 기대치를 혼재시키는 것이다. 자신을 초능력자로 알리며 세인에게 신성시하도록 강변한다는 점이다. 이건 결국, 우리 국민이 대통령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 ‘뭔가 초능력이 있을 것이다’, ‘영웅일 것이다’라는 저급한 욕망을 간파한 것이다. 이런 유권자가 많을수록 정치는 퇴보하게 돼 있다. 허경영, 진복기 두 엽기 정치인의 명망세는 그런 의미에서 한국 정치의 낮은 수준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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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적 사학 운영…김문기 전 상지대 이사장

사진=한겨레


강원도 원주에 있는 상지대학교가 18년 만에 다시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사학분쟁조정위원회가 옛 재단 쪽에 상지대를 넘겨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사태의 핵심 당사자는 김문기 전 상지대 이사장이다. 그는 복귀하려 하지만 학내 구성원 다수는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시계를 18년 전으로 돌려보자.

1993년. 상지대학교의 교수들이 들고 일어났다. 김문기 이사장이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이유이다. 상지대의 재단과 학교 주요보직 곳곳에 친인척과 측근을 포진시켜서 운영권을 완전히 장악해, 축재의 수단으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검찰도 칼을 뽑았다. 입학 또 편입학 과정에서 받은 기부금으로 부동산 투기를 한 혐의에 대해 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예나 지금이나 기부금 입학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3불 정책을 추상같이 지키고 있다. 요즘 3불 정책을 없애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긴 하지만 1불 즉 돈 내고 대학 입학을 허가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국민들의 공감대 형성이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다. 5000여명의 재학생가운데 10%정도가 부정입학생이라는 당시 상지대 교수협의회 소속의 교수 이야기가 있었다. 입학의 대가는 얼마냐. 한의예과의 경우 1억6000만~1억7000만 원, 다른 학과들은 2000만~3000만 원 선이라는 것이다.

학교 주요 보직은 친인척 측근 독차지

이게 과연 가능한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학교 간부진의 라인업을 보면 납득 못 할 일이 아니다. 총장비서실장에 사위, 산하 2년제 대학인 상지전문대학장에 매제, 한방병원 총무과장-교무과장-회계과장-서무과장에 4촌에서 6촌형제 등 친인척 일색이었다. 총장 직무대행과 기획실장, 학생과장은 친인척은 아니지만 측근중의 측근으로 통했다. 이런 구조에서 부정 비리에 관한 내부 고발은 거의 불가능했다.

학생 뽑을 때도 이러한데 교수를 임용할 때는 오죽했을까. 김문기 전 이사장이 재임할 당시, 상지대는 교수 신규 채용 면접을 서울 파고다가구점 안에 사무실에서 했다. 학교가 아니었다. 어찌된 일일까. 일단 가구점 그 안으로 들어가 보자. 김문기 이사장이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재단 관계자처럼 전혀 생기지 않은 사람이 앉아있었다고 하고. 알고 봤더니, 이 사람, 역술가였다. 역술가의 몫이 뭐냐. ‘온순한 사람인지 아니면 말썽 일으킬 사람인지’ 관상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역술인과 이사장의 ‘패스’를 받으면 끝일까. 아니다. 채용하겠다고 마음먹은 교수에게는 ‘봉급포기각서’까지 받았다.

1993년 그 당시 교수들은 선풍기를 틀어놓고 농성을 시작해 석유곤로를 끼고 한겨울을 났다. 6개월을 한 것이다. 일부 학과의 경우는 전원이 유급위기를 맞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

도덕성을 핵심 가치로 앞세운 문민정부는 김문기 이사장을 봐줄 수 없었다. 그가 여당 의원이었고, YS 대통령 만들기의 공신이었지만 말이다. 결국 김문기 이사장은 구속됐다. 의원직을 내놓기도 했다.

파고다공원 가구점에서 역술인과 함께 교수 면접…"'배반할 관상인지' 검증 위해"

김문기 이사장 사건을 반추하면서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일화가 있다. 재단이 학교 발전을 위해 내놓아야 하는 돈, 이를 재단전입금하는데, 김문기 이사장은 이게 3000억도 아니고, 3억도 아니고, 3000만도 아니고, 3000 원이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1년에.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불명예스럽게 타 털어버리고 야인이 된 김문기 전 이사장. 1993년은 액이 잔뜩 낀 한 해였다. 그해 8월초. 큰돈을 강도 맞았다. 그런데 이 강도는 참 특이했다. “당신 집을 헐어 아파트 200채만 지어 무상으로 나눠주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쪽지에 남기고 도주한 것이다. 그래놓고는 사건직후에 언론사에다가 보도 자료까지 보냈다. “내가 강도짓 했다”고. 그리고는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겠다며 훔친 수표를 길거리에 뿌렸다. 한편 피해자가 된 김문기 전 이사장은 경찰이 구치소를 찾아와 사건의 정황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지 캐물었는데도 소극적으로 나왔다고 한다. 여론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김문기 전 이사장은 1년 뒤 대법원으로부터 1년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여기서 공금 횡령 부분은 무죄. 부정 입학 부분은 유죄로 인정됐다. 돈 받고 학교 들어오게 한 거, 이 죄는 인정된다는 것이다. 김문기 전 이사장이 떠난 자리에는 교육부가 파견한 임시이사 체제가 이어졌다. 11년 동안. 그러다 2003년 12월에 변형윤 전 서울대교수를 이사장으로, 또 9명의 인사를 정식이사로 해서 상지대 이사회가 새 출발했다. 이제 이사회는 더 이상 ‘임시’가 아니라 ‘정규’가 된 셈이다.

그러나 김문기 전 이사장 일파가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임시 이사는 임시일 뿐, 정규 이사를 선출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뜻밖에도 2심과 3심 법원은 맞장구를 쳤다. ‘이전 이사들의 결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옛 주인 허락 없이 새 주인 행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현재 새 이사를 선임할 권한은 교육과학기술부 사학분쟁조정위원회에게 있다. 위원은 이명박 정부 들어 대거 바뀌었는데, 면면을 보니 상당수가 김문기 전 이사장과 매우 가깝다. 결국 정권 차원에서 ‘김문기 살리기’ 책동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실제 위원회는 상지대 이사회의 새 이사진 구성 비율을 옛 재단 측 즉 김문기 쪽 5명, 학교 측 2명, 교육과학기술부 추천 2명 등으로 결정했다. 위원회는 7월 30일 본회의를 열어 최종 인선할 예정이다. 그대로 진행된다면 상지대는 김문기 전 이사장에게 운영권이 넘어가게 된다.

"임시이사가 정이사 선임은 무효" 법원 선고로 반격 나선 김문기

학교 구성원들은 집단 반발하고 있다. 옛 재단 인사들을 배제하고 이사회를 꾸리라는 서명에는 전체 교수 254명 가운데 233명, 학생 8000명 가운데 4663명, 교직원 100명 가운데 90명이 참여했다. 사실 현재 상지대 학생들은 김문기 전 이사장과 직접적인 악연은 없다. 1993년 그 시점엔 대부분 유치원에도 다닐 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이 학생들이 또 다시 얼굴도 모를 선배들이 치렀던 곤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텐데. 염려가 크다.

이런 가운데 김문기 전 이사장 쪽에서도 여론전에 뒤질 수 없다며 반대세력과의 총성 없는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런데 방법이 퍽 저열하다. 색깔논쟁을 걸고 있는 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보낸 상지대 임시 이사들을 ‘불법 점령군’으로 부르더니, 지금 상지대가 지금 “김일성대학의 협력대학을 표방”하고 있으며, “소위 운동권 출신 교수들의 편향된 사회주의적 이념과 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아지트, 해방구를 건설하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보수단체까지 가세하고 있다. 뉴라이트 계열의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을 비롯한 5개 단체는 "비리사학 타파를 명분으로 파견된 임시이사들이 사실은 더 큰 비리를 저질러왔다"며 문제 삼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월 "출범 3년차를 맞아 교육 비리를 척결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달라"고 지시했다. 김성훈 전 상지대 총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그런 사람(김문기)이 설사 (돈)보따리를 싸들고 나를 찾아오더라도 문밖에서 쫓아낼 것이다. 나는 그런 돈이 필요 없다"라고 밝혔다고 소개했다. 그렇다면 학내 구성원의 호소에 대통령이 귀를 기울이며 추상같은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이 지경까지 번진 파행을 봉합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현실적인 힘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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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실수의 달인' 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 = 한겨레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하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실수는 가짓수나 내용의 가공함에 있어서 타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워낙 직설적인 정치 언어를 구사하다보니 그렇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9번의 국회의원을 하면서 또 수십 년간 야당을 이끌면서 했던 대중연설이 몇일까. 말솜씨가 그토록 서툴렀다면 과연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의 족적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그랬을까’하는 짐작을 갖게 한다. 어린 시절 고향 거제도 뒷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며 연설 연습을 했다는 일화가 있다. 전국학생웅변대회 입상 경력도 있다. 그 때는 발음도 비교적 정확했고 박력도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화법은 한 마디로 단순 명료하다. 결코 빙빙 돌려가며 얘기하는 법이 없다. 남을 설득할 때에도 목적을 적시하고 요점을 명확히 한다. 이 때문에 상대방으로부터 비교적 빠른 판단을 유도해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이런 화법이 말실수의 수렁으로 빠져들기 십상이란 것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관훈클럽 토론회에 나갔을 때 일이다. 당시 패널로 참여한 한 신문사 논설위원이 물었다. "비핵지대화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거기에는 전술핵도 포함되는지요?"라고 말이다. ‘전술적인 목적으로 만든 핵무기도 없애겠냐’는 물음이었다. 그러자 김영삼 전 대통령, 엉뚱하게도 "원자로 말씀입니까?"라고 물었다. 전술핵은 무기, 원자로는 에너지 생산 장치인데 이걸 서로 헷갈린 것이다.

그렇다. 그래서 신문사 논설위원이 다시 "전술핵, 핵무기 말입니다"라고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더니 또 횡설수설한 모양이다. 그러자 다시 신문사 논설위원, 캐물었다. 듣다 못한 김영삼 전 대통령 발끈했다. "아, 모른다는데 왜 자꾸 그러느냐"라고 말이다. 사실 이 정도면 소탈한 편이다. 딴 정치인 같으면 ‘그 얘기는 따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라며 빠져나갔을 텐데 말이다.

당시 이야기 좀 더 해봐야겠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로서 강원도 유세를 간 모양이다. 여기서 기념비적인 실언을 했다. "강원도민 여러분, 저는 대통령이 되면 강원도의 아름다운 지하자원을 개발해서……."라고 공약했다. 지하자원이 아름다워 봤자 아니겠나? 원래 ‘아름다운 자연과 풍부한 지하자원을 개발한다’는 말을 하려던 차였다. 비슷한 예가 또 있었다. ‘공정한 인사를 해서, 부패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 이래야 하는데 “공정한 인사를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또 ‘군정을 척결하겠습니다’ 이래야 하는데 “군정종식을 척결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사례는 한 기자에게서 전달받은 것이다. 대선이 끝나고 야당 총재를 할 때, 한 번은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신문’이 김영삼 총재와 인터뷰했다. 이 내용이 지면에 크게 실린 모양이다. 흥분한 김영삼 전 대통령, 주변에 있던 기자들에게 크게 알렸다. “기자 여러분들, 내가 ‘사우나 신문’에 실렸습니다. 이거 보세요”라고 말이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가 ‘사우나’로 축약이 된 것이다. 

사실 외국어 발음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난제 중에 난제이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이름을 잊어버려 회의석상에서 머뭇거리다가 '차씨'라고 발언했다. 소련을 방문했을 때 ‘이그나텐코’ 타스통신 사장을 ‘이그나탱크’로 불렀다. 대통령이 돼서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을 때에도 대통령 카리모프를 '카리모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비서들이 식탁 명패 뒤에 이들의 이름을 ‘대문짝만 하게’ 한글로 써놓았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호칭도 자주 혼동했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었다"가 있다. 위대한 왕 아니었을까. 무역 장벽을 없애자는 취지의 통상협상을 말하지? ‘우루과이 라운드’는 ‘우루과이 사태’로. 동학운동의 기수 전봉준 장군을 ‘정몽준 장군’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를 ‘역사의 아이노리’라고 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뇌물 스캔들이었던 ‘리쿠르트 스캔들’을 ‘요구르트 스캔들’로 이야기해 화젯거리가 됐다. 

이번엔 1994년 1월 3일의 청와대 신년하례회에서 했던 말이 있다. ‘개의 해’를 맞아 김영삼 대통령은 "개는 아주 충직하고 성실하며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고 있다"라고 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달리는 기차를 향해 소리 높여 짖는 것도 개다"라고 하더니 "그러나 우리의 달리는 기차는 개가 짖어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진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개의 쓰임새가 참 다양함을 느낄 수 있는 발언이었다.

출근길에 벌어졌던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사고가 나고 며칠 뒤인 1995년 5월 2일 상황으로 가보자. 김영삼 대통령은 여당 초재선 의원들을 청와대로 불러 저녁을 함께 먹였다. 그리고는 "대구 (가스폭발) 사고는 정부도 공동의 피해자다”라고 하더니 “76명의 실종자가 발생한 사고가 난 사고가 미국에서 났는데도 그 나라 정부는 비난 받지 않는다. 오히려 대통령의 인기가 올라가더라."라고 했다. 보도가 잘 안 돼서 망정이지 제대로 쟁점화 됐더라면 지지율이 땅 바닥으로 꺼질 뻔 한 위험한 발언이었다.  

어느 해인가 연말, 한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어려운 수출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김영삼 대통령은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했다. 당시에는 600억 달러를 수출하고, 800억 달러를 수입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수입(輸入)은 수출의 반대개념이지? 그런데 외국 물건 사오는 것. 이걸 income 즉 수입 지출할 때 수입(收入)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러더니 “지금 200억 달러이나 흑자가 났습니다”라고 했다. 정확하게는 적자가 났는데 말이다. 

어쨌든 좌중에서 박수가 터졌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 그냥 넘어가던지 해야 하는데, 또 겹실수를 해 버린다. 난데없이 “큰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왜 이랬을까. 흑자하면 흑싸리 껍데기, 흑심 이런 부정적인 어감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흑자를 나쁜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더니 “내년에는 반드시 적자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 했던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뚝심의 사나이였다. 얼마 뒤에 이 나라에는 외환위기가 불어 닥쳤다.

초등학교 방문 일화도 화제이다. 서울 구로 지역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밥을 굶는 어린이 즉 '결식(缺食) 아동' 문제를 언급했다. 그런데 자꾸 '걸식(乞食) 아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작대기 하나가 있고 없고의 문제지만 결식과 걸식은 대단히 심각한 차이가 있다. 걸식 아동은 밥을 구걸하러 다니는 아동을 말한다. 그 학교는 굶은 것은 물론, 구걸하러 다니는 어린이가 많은 학교가 돼 버렸다.

이런 실수담은 퇴임 후에도 끊임없이 양산됐다. 한 번은 자택이 있는 서울 상도동 근처에 한 중학교에 가서 이런 연설을 했다. “책은 인류의 도구이자 소중한 문화이다. 학창시절에 책을 읽는 것은 평생의 큰 재산이다”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일제 때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톨스토이의 ‘죄와 벌’도 읽었다”고 말했다. 뭐가 좀 이상하지 않나? 톨스토이는 ‘죄와 벌’을 쓰지 않았다. 도스토옙스키가 썼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이런 잦은 말실수에 대해 뭐라고 설명할까. 억지핑계를 대거나 그럴듯한 변명으로 모면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실수를 범할 때마다 “이래야 분위기가 덜 딱딱할 게 아니냐”라며 너스레를 떤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각도의 해석도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실언을 건건이 살필 경우, 매우 심각한 현상으로 해석되며, 이런 실상이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데에는 자유를 제약 당한 언론의 현실 때문이란 주장이다. ‘김영삼 이데올로기’를 쓴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오늘날의 김영삼을 키워준 것은 언론이다. 언론의 권력에 대한 ‘탐욕’과 김영삼에 대한 ‘의리’는 그의 자질을 은폐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라며 비판했다. 통치자로서는 치명적인, 단순한 실수라고 볼 수 없는 결함이라는 얘기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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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의 달인' 김영삼 전 대통령

‘직관’이란 말의 뜻은 무엇일까. 사전에서는, 크기, 모양, 색깔과 같은 한 가지 두드러진 속성에 근거해서 대상을 이해하려는 사고라고 정의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딱 한 번 보고 동물적인 감각에 의해 단번에 ‘하느냐’ ‘마느냐’를 판단하는 안목이라 하겠다. 이 때문에 그 속성은 대단히 주관적이고 비논리적이다. 이 직관이 정치와 합체된다면 어떻게 될까? 순기능만 발현된다면 ‘승부수’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파멸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기실 현실 정치에 있어서 무턱대고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직관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야기했지만 ‘정치는 생물’이다. 정확한 공식이 있거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법칙이란 없다. 게다가 적자생존의 원리가 강하게 살아있는 한국 정치 현실에서는 직관은 오히려 논리보다 더 먹힌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오늘 만날 달인은 직관으로써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하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두 사람을 대조해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직관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대조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상당히 심사숙고하는 유형이다. 한 원로기자가 분석한 것이 있다.

김영삼은 지갑 통째로…김대중은 지갑에서 돈세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정반대의 인간형입니다. 김영삼은 경상도 사나이답게 논리적이기 보다는 충동적, 감각적입니다. 반면에 김대중은 논리적이며 노력하는 스타입니다. 치밀하며 중요한 것 뿐 아니라 사소한 것까지 직접 결정합니다. 돈, 정치자금을 관리하는 방식에서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일화도 많다. 한 번이 자기를 따르는 후배 정치인이 와서 “총재님, 이번에 제 아들이 결혼 합니다”라고 하면, 김영삼 전 대통령 같은 경우, 지갑에 있는 돈을 세보지도 않고 통째로 꺼내서 건네는 스타일인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해가 없도록, 등 돌려서 세 본 다음, 남들 준만큼 똑같이 사사한다는 것이다.

직선제 개헌 투쟁 당시 일화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민주당 이낙연 의원이 밝힌 비화이다. 1987년 4월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이른바 ‘호헌조치’ 직후 양김이 만났다. (여기서 호헌조치라 함은 대통령 간선제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발표를 뜻한다.) 직선제 개헌에 대한 여망이 있는 국민의 뜻을 반하는 조치라 하겠다. 

그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백만인 서명운동을 합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백만이 뭐꼬? 천만으로 합시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김대중 전 대통령, 얼굴빛이 상기되더니 ‘우리나라 인구가 몇 명인데 천만 명의 서명을 받는단 말이오’라고 했다고 하고. 그러자 김영삼 전 대통령, ‘그걸 누가 세어 보나. 일단 하자고’라고 이야기했단다. 그래서 결국 천만인 서명운동은 시작했고. 결국 성공했다고. 성공했다 함은, 천만이 달성됐다는 이야기일까. 숫자 천만을 확인했다는 기록은 현재 전혀 남아있지 않다. 

또 사람 쓰는 스타일에 있어서도 두 정치 거목은 극명한 차이를 드러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직관에 의존하여 정치를 하고 참모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스타일이다. 그러다보니 인재가 주변에 많았다. 김영삼이 발탁한 인물을 보자. 대표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다. 물론 자신과 결별한 뒤 따로 나가 성공한 케이스지만 말이다. 손학규 민주당 전 대표,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 이인제 의원, 이재오 전 국민권익위원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같은 인사도 현재 친하건 친하지 않건 간에 김영삼의 사람이었다. 

이 직관력은 현대사의 주요 굴곡을 뛰어 넘는 힘이 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유신체제와 80년대 권위주의 시대를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일관했다. 이러다보니 의원직 박탈과, 가택 연금을 당하는 시련을 만났다. 하지만 그때마다 굴하지 않았다. 1983년 광주항쟁 3주년을 맞아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투쟁 그리고 12대 총선에서 야당 돌풍 또 1987년 6월 민중항쟁을 주도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더불어 민주화운동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 ‘몸 상하지 않을까’ ‘이런다고 될까’ 이 국면에 있어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좌고우면은 필요 없었다. (물론 단식투쟁과 관련해서는 ‘과연 실제로 했겠는가’하는 소문도 없지 않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야당이 돼도 여당이 돼도 투쟁 또 투쟁

절차적 민주화가 완성되면서부터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 패배에 이어 이듬해 4월 총선에서 제2야당의 자리마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평화민주당에게 내준 김영삼 전 대통령. ‘구국의 결단’임을 앞세워 3당 통합을 전격 선언했다. 그리고 자기 당으로 만들었다. 이종찬, 박태준, 박철언 씨 같은 민정계 인사들과 내부 권력투쟁을 거치며 말이다. 종국에는 최종적으로 라이벌 김대중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대권을 거머쥔다. 

당선돼서도 투쟁은 계속됐다. 5,6공의 주축을 이룬 신군부 개혁을 위해 군내에 사조직인 하나회를 하루아침에 숙정했다. 이런 식이었다. 퇴근 후에 군 인사를 전격적으로 단행한다. 하나회 출신 장성 가운데 꽃보직을 갖고 있던 인사들, 다음 날 아침, 출근했을 때에 자기 자리가 싹 사라진 것을 확인하게 된다. 뭐 어찌할 도리 없이 짐만 챙겨 귀가한다. ‘하나회 숙청이 제일 쉬웠어요’라고 호기부릴 만한 사건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런 과단성을 높이 샀다. 만약 김영삼 전 대통령의 군부 숙정이 없었다면 하나회 인사들이 딴 마음 먹으며 문민정권의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문민 통치가 지속 가능하도록 군부를 제자리에 놓은 공로가 있던 것이다. 아까 깜짝 작전 이야기를 했는데, ‘금융실명제 실시’ 역시 속전속결로 비밀 군사작전을 진행하듯 느닷없이 발표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그분 즉 김영삼 전 대통령의 이런 장점은 내가 도저히 따라가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도 먹히는 '직관'인가

하지만 이런 직관력, 현재도 유효한지 모르겠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임기 말을 초라하게 했던 외환위기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 특유의 직관력이 경제 부문 특히 외환 보유고가 서서히 줄어드는 국면에 발동했더라면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세종시 수정안 발표 이틀을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았다. 아마도 탁월한 직관력에 기대 정치적 코치를 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좌고우면하지 말고 마음먹은 것은 밀고 가야 한다”라고 한 모양이다. 여기에 힘을 받았던 모양이다. 세종시 수정안과 관련해 청와대나 정부는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입장이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6.2 지방선거에서 충청권의 완패, 친박 또 야당의 반대로 국회 입법과정에서 부결만 낳았다. 괜히 긁어 부스럼만 남겼다. 본전도 못 찾은 것이다.

“머리를 다른 사람 것 빌리면 된다”는 말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초에 했다. 그러나 ‘대여한 머리’는 IMF를 불렀다. 이런 김영삼 전 대통령의 머리를 빌린 이명박 대통령. “빌릴 걸 빌려야지”라는 비판을 듣고 있다. 직관의 결과는 이렇게 참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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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투쟁의 패자' 박철언 전 의원

사진 = 한겨레

‘박테리우스’! 박테리아를 연상케 하나. 별명을 이렇게 짓고 싶다. 왜냐. 성은 박(朴) 씨이고, 신분은 ‘테리우스’ 즉 왕자님 급이었으니까. 한 때 ‘6공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전 의원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정권 실세다 보니 낯 뜨거운 별명이 더 있다. 자신의 사조직 월계수회의 한 멤버가 지어준 ‘떠오르는 태양’이 그렇다.

때는 박철언 전 의원이 초강력 실세로 떠오르던 1991년 3월. 월계수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나창주 당시 민주자유당(민자당) 의원은 ‘떠오르는 태양’, ‘북방정책의 상징이자 책임자’, ‘민족통일의 기수’이라며 추앙했다.  이듬해에 대선이 있어서 그랬던 것일까. 이런 멘트를 소개하는 나도 낯 뜨겁다.

여담을 해보자면, 원래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였던 나창주 의원은 나중에 학교로 돌아갔을 때, 학생들로부터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어설픈 우상화로 정치인이 만들어 지겠느냐”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시즌 2인 줄 알았다”는 식의 비난 공세에 시달렸다. ‘떠오르는 태양’이란 별명은 힘 있을 당시, 또 힘 빠진 지금에도 박철언을 따라다닌다. 그 해는 언제쯤 지기 시작했을까.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 아호)에 가리면서부터였다.

노태우 부인 고모의 아들 박철언

우선 인간 박철언에 대한 설명부터 한다. 박철언 전 의원의 고종 사촌 누나는 바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인 김옥숙 씨이다. 김옥숙 씨 고모의 아들이 박철언 전 의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태우 전 대통령과 박철언 전 의원은 대통령 친인척 간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노태우 전 대통령과 각별했던 모양이다. 박철언 의원이 중학생, 김옥숙 씨가 대학생일 때 둘에게 노태우 전 대통령이 영어를 가르쳐줬다고 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옥숙 씨는 그럼 어떻게 만나게 됐느냐. 김옥숙 씨의 작은 오빠였던 김복동 씨가 친구 노태우에게 동생을 소개해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배경’이 박철언의 승승장구 전체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알아서 컸던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검사가 됐다. 그러다 서울지검에 있을 때였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사건을 만나게 됐다. 이때 전두환 합동수사부장은 박철언 검사를 차출했다. ‘노태우의 동생’이라며 시켜봤는데 실력이 꽤 있었다. 부지런한데다 논리도 정연했다. 복잡한 내용도 쉽게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을 유감없이 선보인 것이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대통령이 된 다음, 박철언 검사를 청와대 법률비서관으로 끌어왔다. 한동안 ‘전두환 사람’으로 일하던 1985년, 박철언 비서관은 안기부 특보로 자리를 옮긴다. 이때부터 서서히 시동을 건다. ‘매형을 다음 대통령으로 만들기’ 이 작업에 말이다. 매형의 킹메이커가 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슬 퍼렇던 군사 독재정권 시절에 ‘차기’를 논의하는 것은 스스로 호랑이 새끼를 자임하고 나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전두환 대통령은 누구처럼 헌법 바꿔가며 서 너 번 하지 않고 한 번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박철언 특보는 ‘전두환이 약속을 부도내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 속에 물밑에서 치밀하게 ‘차기’를 준비했다. 이를테면 남 몰래 얻은 고급정보를 매형 노태우 민정당 대표에게 족족 건넨다. 정치를 하려면 정보가 있어야 한다. 하다못해 동네 구의원 선거를 하더라도 상대진영 후보의 동선 파악은 기본이어야 한다. 끄나풀 한 두 명은 심어놓아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정치력은 정보가 원천이고, 정보력은 정치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정보 확보 뿐 아니다. 박철언 특보는 탁월한 정세 분석 능력 또 치밀하고 과단성 있는 승부수를 노태우 대표 앞에 착착 진상했다.

'매형 대통령 만들기' 1등 공신

이 가운데 하나가 ‘6.29’라고 박철언 전 의원은 주장한다. 그런데 ‘6.29 선언 아이디어’의 주인공은 한 두 명이 아니다. 김용갑 전 한나라당 의원 또 전두환 전 대통령도 ‘본인 작품’이라고 떠벌린다. 이걸 보면, 갑자기 연예계의 이런 속설이 반추된다. “김건모 키웠다는 사람만 대한민국에서 80명이 넘는다”라는.

박철언은 그 해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를 위해 사조직인 월계수회를 만든다. 회원만 200만. 대단했다. 정치의 화룡점정,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정보 뿐 아니라 조직 구성도 필수인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오른팔 최형우 전 의원이 2만이던 민주산악회를 1992년 대선을 앞두고 150만으로 불린 사례도 있지 않던가.

‘잠룡’ 노태우 대통령을 비룡으로 만든 박철언 특보는 대통령 당선 이후부터 구름을 걷는 듯 했다. 2년 동안 청와대 정책보좌관 또 정무장관을 거쳤지만, 직책은 허울 뿐, 그의 권력은 무소불위였다. 1988년에 치른 13대 총선에 월계수 회원들을 대거 국회에 진출시킨다. (이 가운데 강재섭 한나라당 전 대표도 일원이었다.) 그리고 북방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그러면서 또 하나, 난제였던 ‘5공 청산’ 작업도 주도한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집권 민주정의당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그래서 ‘5공 청산’ 작업이 탄력을 받은 것처럼 비춰졌다. 그러나 아무리 여소야대라도 청와대와 여당이 5공 청문회에 대해 “OK”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노태우 대통령의 의지가 있었기에 ‘전두환 털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 뒤에 부채질한 주인공이 박철언 장관이었고. 이와 관련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백담사에서 “한 번 손 봐야 할 사람을 용서했다”면서 “겁 없이 날뛰는 젊은 사람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누구를 두고 한 말이었을까?

이제 김영삼과의 ‘진검승부’ 이야기를 할 부분이다. 두 사람은 1990년 3당 합당 뒤에 한솥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박철언 장관의 세도는 여전했다. 정계개편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노태우 대통령의 대리인으로서 야당과 접촉한 당사자가 바로 박철언 장관이었거든.

그런데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태도가 마땅찮았다. 당시 민주당 인사들은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로 간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했다. ‘듣는 호랑이’ 기분 좋았겠나. 게다가 대권과 관련해 자기 뒤로 줄 서야 할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이 순번을 무시하고 새치기하는 듯 모션을 취했다. ‘노태우의 2인자’도 아니고 ‘동업자’인양 떠벌리고 다니는 모습을 계속 노출했던 것이다.

'미래 권력' 놓고 YS와 사사건건 충돌

이러다보니 사사건건 김영삼 대표와 충돌했고 두 사람의 갈등은 합당 선언 두 달 좀 지났던 시점에 폭발한다. 그때가 1990년 3월 29일. 김영삼 대표의 왼쪽 팔이었던 고 김동영 의원이 기자들 앞에서 거칠게 한마디 했다. “박철언 장관이 똑똑해서 일은 잘하는데 자기를 너무 내세우는 게 흠이야. 자꾸 그렇게 나가면 이기붕이 꼴을 면치 못할 거야.” 원색적인 비난이었다. 야당 생활로 잔뼈가 굵은 상도동계, 강펀치만은 자신 있었다.

사건은 이랬다. 김영삼 대표가 그 무렵 소련을 방문했다. 그때 국가원수인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만났다. 이때 동행한 박철언 장관,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를 직접 전달하려고 했다. 그런데 김영삼 대표가 ‘노태우의 분신’ 박철언 장관에게 전혀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고르바초프에게 노태우 친서를 전달할 기회를 찾지 못한 박철언 장관, 얼굴이 붉어진 채 귀국하자마자 청와대로 향했다. 그리고 노태우 대통령을 찾아가 미주알고주알 상황을 다 일러바쳤다. “각하, 김영삼 대표가 가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자기 이미지 관리만 했습니다.” 이랬을 것이다.

이튿날 노태우 대통령은 소련 방문 결과를 보고하러 온 김영삼 대표를 시큰둥하게 맞았다. 귀국하자마자 기자들 앞에서 김영삼 대표가 떵떵거리며 “이제 한반도의 전쟁위험은 사라졌다”라고 한 발언을 두고, “그게 그렇게 단 칼에 무 자르듯 설명할 수 있는 문제냐”라며 나무랐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돌아온 ‘직관의 명수’ 김영삼 대표, 혼잣말로 “이놈을 가만두나 봐라”라고 했다고 한다. 누군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가서 사전에 초를 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다들 ‘이놈’이 누굴까 궁금해 했다.

그런데 이때, 박철언 장관이 “한 개인의 정치적 홍보를 목적으로 하는 외교여서는 안 된다”라면서 ‘내가 그 초친 사람이오!’라고 선언했다. 김영삼 대표 측은 이때부터 엄청난 포화를 퍼부었다. “심지어 여당 최고위원인 나에게도 공작정치를 하려고 덤벼든다. 공작 정치했다가 망하지 않은 정권을 봤느냐. 노태우 대통령이 주변사람을 잘못 쓰고 있는데 실망했다”라고까지 했다.

초강경 발언이었다. 이건 박철언 장관 뿐 아니라 노태우 대통령도 겨냥한 것 아닌가. 김영삼 대표는 더 나갔다. 노태우 대통령이 주재하는 당직자 회의에 감히 불참하고, 이튿날에는 당사에도 안 나오지도 않았다. 답답한 건 청와대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노재봉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상도동으로 보내서 달랬다.

"내가 입 열면 YS는 끝나" 박철언 맹폭…그게 자폭될 줄이야

그런데 며칠 뒤, 이번엔 박철언 의원이 포격을 가했다. “내가 3당 통합 과정이나 소련 방문 기간 중에 있었던 일에 대해 진실을 얘기하고 반격을 가할 경우 김영삼 대표의 정치생명은 하루아침에 끝날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게 바로 정치권 인사들의 관용적 표현인 ‘내가 입만 열면 여럿 다친다’이다.

3당 통합 과정에서의 ‘진실’은 무엇일까. 2005년에 박철언 전 의원이 폭로한 게 있다. “1990년 3당 합당을 전후해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에게 40억 원이 건네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돈 받고 합당에 응했다는 설명이다.

박철언의 공격에 김영삼 대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나에 대한 공작정치가 진행되고 있다. 위아래도 없는 민자당의 기강을 바로잡겠다. 박철언은 장관직을 그만두라” 이랬다. 그러더니 노태우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계획을 파기했다. 측근 의원들은 손 놓고 있었을까. 아니다. 수십 명씩 몰려다니며 단합모임을 가졌다. 기자에게 노골적으로 “청와대가 박철언을 두둔하면 우리는 판 깨고 다시 야당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결국 노태우 대통령은 백기를 들었다. 박철언 장관은 사퇴시킨 것이다.

그렇게 김영삼 대표는 민자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훗날 대통령 후보가 된다. 이와 관련해서 훗날 박철언 전 장관은 이런 회고를 했다. “‘당신을 차기 주자로 삼겠다’고 통보했을 때, 김영삼 대표가 노태우 대통령 앞에서 큰 절을 했다”라고. 물론 이 주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확인을 받은 바 없다. 대선 목전에 박철언 의원은 탈당한다. 사촌 누나 김옥숙은 “훗날을 위해서라도 YS를 도우라”고 충고했지만 본인은 그렇게 하려야 할 수 없었던 비위였다.

슬픈 예감은 어김없었다. ‘입 만 열면 끝날’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박철언에게는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후 석 달 만에 박철언 전 장관은 친정인 검찰에 불려 나간다. 슬롯머신 업자에게서 5억의 돈 받은 혐의였다. 그때는 털면 바로 털리던 시대였다.

덧없는 권력 아귀다툼…그 싸움엔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사실 모르나

이연홍 전 <중앙일보> 기자의 회고 내용이 있다. 검사에 쫓기던 박철언 전 의원이 당시 자신에게 전화를 해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알려줬는데. 몇 분 뒤 김현철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것이다. 김현철 씨는 “당신이 박철언 씨에게 번호 알려줬느냐”라고 물었다. 이연홍 기자는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박철언 씨와 어떻게 통화했느냐”라고 물었다. 김현철 씨는 “뭘 통화해? 그냥 끊었지! 아휴, 놀랐네” 이랬다고 한다. 박철언 전 장관은 마지막까지도 피하려 했던 독배였다. 이튿날 박철언 씨는 검찰에 나갔고, 구속됐고, 1년 4개월 동안 감옥신세를 졌다.

물론 박철언 의원은 이 수사를 정치 보복이라고 말하다. 하지만 상당수 국민들은 담당 검사를, 부패청산작업을 주도한 이탈리아의 피에트로 검사의 한국 버전이 탄생했다며 추앙했다. 물론 박철언 의원 본인은 “권력의 청부를 받아 수사한 ‘한국의 피에로’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이 검사가 누구냐. 바로 이번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는 홍준표 의원이다. 박철언 의원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외면했다. 끝내 ‘떠오르는 태양’은 유죄 판결을 근거로 의원 배지를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날 수 없었다. 박철언 의원의 부인은 남편 대신 재선거에 나가 당선됐다.

권력. 지나고 나면 참 덧없는 것이라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야기하던데. 그 아귀다툼의 역사는 20년 가까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여전하다. 대통령이 줄 수 있는 자리가 2만 개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게 천 년 만 년 가는 건가. 길어야 5년이다. 또 처신 똑바로 못하면 법적인 책임을 지는 것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가능성도 있다. 이른바 ‘실세’들끼리 벌이는 ‘누가 더 많이 가졌네’ ‘누구는 빈손이네’하는 논란에서 승자란 의미 없다. 일단 권력을 쥔 이상 모두 역사의 준엄한 심판대 위에 오르기 때문이다. 비리 혐의로 감옥 갖다오고 그 뒤로 정치 중심에 단 한 번도 서지 못하는 박철언 의원, 문민개혁 호기 떨다 아들 비리에 외환위기 초래라는 망신살을 뻗은 김영삼 대통령, 도대체 누가 승자란 말인가. 그래서 결론 겸 교훈은 이렇다. ‘한철장사에 목숨 걸지 말자!’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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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代辯)의 달인' 박희태 국회의장

여야 통틀어 최장수 대변인은 민주당 대변인을 지낸 유종필 서울 관악구청장이다. 4년 10개월 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본인이 대변인으로 있는 동안 민주당이 원내 제1, 2, 3, 4, 5당을 왔다갔다했다는 점이다. 이 사람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역대 최장수 ‘여당’ 대변인을 만나보려 한다. 이 사람은 4년 3개월이다. 국회의원 임기가 4년인데, 이 임기를 넘겼다는 얘기이다. 시킬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다. 너무나 ‘환상적’으로 잘해서 그냥 자리에 말뚝을 박은 것이다. 너무 오래하다보니 ‘이 양반 정치인생, 대변인으로 끝나는 거 아닐까’하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박희태 18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을 말하려는 것이다. 2008년 10월 재보선에서 맹추격하던 송인배 민주당 후보와의 경쟁에서 어렵게 이기고 국회에 입성한 주인공이다. 항상 느긋한 폼을 유지하고 있어 검사 출신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이다. 하지만 어느새 5선을 넘어 6선이 됐다. 검사에서 정치인으로 완전히 탈색한 것이다. 박희태 의장은 1988년 13대 당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처음 당선된다. 여느 정치 검사처럼 “검사 일을 하며 국민에게 새롭게 봉사할 방도를 찾다가 정계 진출에 뜻을 두게 됐다”라며 거창한 커밍아웃의 변을 남기지 않았다. 그냥 “나가라고 해서 나왔다”라고 말한 것이다. 여당에서 징발(徵發, 국가에서 특별한 일에 필요한 사람이나 물자를 강제로 모으거나 거둔다는 뜻)하니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4년 3개월...확실히 입지굳힌 노태우 정부 여당 대변인
 
박희태 의장이 대변인을 그만하게 된 이유도 딱히 교체의 필요성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법무부장관으로 불려갔기 때문이다. 당에서는 아쉬움을 크게 토로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민정당 대변인을 하다가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면서 생긴 민주자유당의 대변인을 이어 받았다. 지금도 박희태 전 대표는 전설의 대변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대변(代辯)의 레전드이었다. 

무엇이 박희태 대변인 체제를 공고하게 했을까. 역설적으로 ‘살벌한 정치현실’이었다. 대변인 자리에 오를 때는 5공이 끝난 직후였다. 5공 청산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뜨거웠던 터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 뿐 아니라 친구이면서 12.12쿠데타 동지인 노태우 대통령도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게다가 3김이 주도한 야당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연일 여당 비판을 통해 선명성 경쟁을 벌였다. 정치적으로 뒤 엉킨 혼돈기이었다. 이런 때 여당 대변인의 입장은 참 난처했다. 정치의 달인 3김의 당이 쏟아내는 거센 정치공세를 차단시켜야 했다. 여당의 명분 없는 주장마저 명분을 덧씌워야 했다. 5공의 후예라는 이유로 눈총을 보내는 국민의 입장을 헤아려야 했다. 위기의 초선 박희태. 그러나 전설을 만들어 냈다.

박희태 ‘대변인 신화’,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 우선 ‘폭탄주’이다. 대한민국은 폭탄주 문화의 산실이다. 이 폭탄주를 만든 사람이 박희태 지검장이라는 것이다. 춘천지검장으로 있을 때. 지역기관장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다. 지금이야 지역 기관장하면 도지사, 국회의원, 시장, 지검장 이런데. 군사정권 시절에는 ‘VIP의 순번’이 달랐다. 지역 군 사령관이 시쳇말로 ‘킹왕짱’이었다. 군사정권에서 군인이 왕이란 건 사족이다. 이러다보니 사령관의 허세는 가관이었다. 

맥주잔에 소주 부어 마시기 싫어 창시한 폭탄주

그때 사령관, 기관장들 불러다 놓고 맥주 컵에 양주를 좔좔 부어 마시게 했었다고 한다. 다들 쩔쩔맸다. 사령관의 호기는 천장에 닿았다. “아니 이것도 못 마셔?” 이러며 말이다. 생각해보라. 맥주 컵에 소주를 부어 마셔도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든 판인데, 거기에 양주를 넣어 털었다니. 술 좋아하는 박희태 지검장도 이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기지를 발휘했으니, 양주를 원래 양주잔에다 부어 이걸 맥주 넣은 맥주컵에 넣고 마시는 ‘알콜 컨버전스’을 창시한 것이다. 박희태 의장은 나름 순한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했는데. 후대 사람들은 이를 ‘폭탄주’로 부르고 있다.
 
지난 17대 국회에서 한나라당 박진 의원은 ‘폭소클럽’을 만들었다. 폭탄주 소탕 클럽의 준말이다. 그 나름 의미 있는 취지의 모임이지만 여기에 가입을 거부한 두 명의 의원이 있었다. 민청학련 사건 당시 사형선고를 받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냈던 열린우리당 유인태 의원과, 바로 박희태 의장이었다. 가입 불가 사유은 간단했다. “술 없이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것이다. 한국 사회만큼 ‘술’을 매개로 인연(人緣)을 심화시켜 나가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기자에게 술사며 내 편으로 만드는 본분, 두주불사(斗酒不辭, 말술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술을 매우 잘 마심을 이르는 말) 대변인에게 딱 맞는 조건이다.

“정치인으로 출세하고 싶은가? 대변인이 되라!” 이런 말이 있다. 사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두 차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세 차례,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 차례 야당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또 박희태 의장 후임인 강재섭 한나라당 전 대표, 손학규 통합민주당 전 대표 역시 민주자유당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이 밖에 이인제 박지원 의원, 오세훈 서울시장 등도 대변인을 거친 유명 정치인이다.

반면 여의도의 유일한 3D업종이란 얘기가 많다. 출세코스인데다, 대중 노출도도 높지만 “대변인, 안 시켜줘서 불만이다”라는 말은 없다. 왜 마다할까. 대변인직을 그만두겠다는 정치인들의 변을 들어보면 안다. 십중팔구 ‘건강 악화’이다. 그만큼 힘들고 고된 자리다. 수십명이 넘는 출입기자들을 밤낮없이 상대해야 한다. 종일 휴대전화를 입과 귀에 달고 다닐 수밖에 없다. 선거 때는 하루에 열두 번도 넘는 성명·논평을 내야 한다. 상대당에 대한 비난·공격거리를 찾아내 양해가 가능한 수위의 ‘독한 말’을 뽑아내야 하는 '악역'이다. '정쟁 유발의 주범'으로 몰리다보니 마음고생도 적지 않다. 당 안팎에서 터지는 대소사(大小事)의 뒤치다꺼리도 챙겨야 한다. 이러니 누가 좋아하겠나. 그런데 밤마다 폭탄주 마셔가며 4년을 지내온 박희태 의장. 그래서 이 사람의 ‘대변인 신화’를 설명하는 두 번째 키워드는 ‘건강’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 이 말도 지어내

세 번째는, ‘조어(造語, 말 지어냄)’이다. 사실 이걸 설명하기 위해 많은 이야기가 필요했나보다. 오늘날까지도 정치·사회 각 분야에서 널리 회자되는 정치 조어를 한 주인공이 박희태 전 대표이다. 어록도 어록이지만, 박희의장의 신조어는 정말 길이 빛날 것들이 많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냐’ 이거 박희태 의장 작품이다. 이 말은 사실 대변인직을 하던 때 나온 게 아니다. 1996년 총선 이후, 여당과 균형 있는 의석을 확보한 야당이 여당을 몰아세우자, 꺼냈던 말이다. 직설적 언사에 비해 풍자는 듣는 사람의 노기도 덜 건드린다. 남을 배려하는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야당 총재에 대해서 박희태 의장은 적잖이 배려했다. 박희태 의장의 또 다른 신조어 ‘정치 9단’이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치 9단’이란 말도 박희태 의장이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1989년 12월 5공 청산 문제를 풀기 위해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야3당총재가 청와대에서 만났다. 이때, “대통령과 세 분 총재는 모두 ‘정치 9단’의 입신(入神)의 경지에 있다”고 표현하여 그 유명한 ‘정치 9단’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1990년 봄은 혼란하고 불안했다. 3당 합당으로 정치권과 대학가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경제상황도 안 좋았다. 당시 이승윤 경제부총리가 이를 ‘Total Crisis’라고 표현했다. 그자 박희태 대변인, 이걸 그대로 옮기지 않고, 번역했다. 그러다보니 ‘Total Crisis’은 잊혀졌고, 번역한 말이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오늘날까지 말이다. 바로 ‘총체적 난국’이다. 이 말이 오랫동안 쓰이는 것은 번역이 탁월한 면도 있지만, 그이후로 지금까지 ‘총체적 난국’이 아닌 적이 없었기 때문은 아닐까. 

촌철살인의 논평도 빛났다. 1991년 세칭 ‘수서택지 특혜 분양사건’을 공격하는 야당의 장외집회에 대해 ‘보라매공원 집회는 보람이 없었다’, ‘여의도 집회는 여의치 않았다’, ‘부산 집회는 부산만 떨었지 실속은 없었다’고 일갈했다. 그 이전 얘기인데. 대학생들이 당사를 기습점거했다. 험악한 상황에서 박희태 대변인은 “귀여운 아가들이 당을 방문했다”고 서두를 꺼냈다. 이 논평은 아직도 정가에 회자되고 있다. 

그가 만약 이명박 시대 야당 대변인이라면...

이무렵 야당 대변인들, 상대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도 좀 균형추를 이루며 맞상대를 이뤘던 인물이 있었으니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던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이다. 박희태 의장 만큼은 아니지만 3년이란 긴 기간 동안 야당의 '명대변인'으로 활약했다. 박지원 원내대표의 히트작품으로 이게 있다.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이 되나' 어떤가. 이런 비유, 표현들. 정치인이 했다는 이유로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렇게 4년 고생한 게 박희태 의장에게는 큰 자산이 됐다. 대변인을 마치자마자 법무부장관에 발탁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오래 하지는 못했다. 외국에서 공부한 딸이 국내 대학에 편법으로 입학하는 바람에 중도하차한 것이다. 사실 이명박 정부 시대의 인사 기준으로 보면 전혀 문제될 일이 아닐 것도 같은데 말이다. 그러나 당시는 거침없는 사정을 앞세운, ‘칼국수 개혁’으로 상징되는 김영삼 대통령 정부 초기였다. 아주 큰 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물러나서 한동안 잠잠했다. 그러다가 다시 정치의 중심에 서서 한나라당 원내총무, 부총재, 최고위원을 거쳐 당 대표를 두어 번 지냈다. 

그런데 왜 2008년 18대 총선에는 나오지 않았을까.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일등공신이다시피했던 박희태 의장 아닌가. 하지만 공천 혁명이 필요하다는 당내 분위기 때문에 5선을 지냈던 경남 남해 지역구를 후배에게 물려주게 된 것이다. 그러다 7월에 당 대표에 취임했지? 그러나 원외 당대표라는 점은 내내 한계로 작용했다. 결국 당 대표를 내놓고 양산 출마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박희태 의장은 야당 대변인으로 이런 논평을 들었다. "1학년 1반 반장 선거에 떨어졌다고 다시 1학년 2반 반장 선거에 나가서야 되느냐." 과거 명대변인이었던 박희태 의장, 후배 대변인의 이런 논평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우리 정치, 박희태식 워딩이 아쉽다. 수 년 전 박희태 의장이 ‘대변인’이란 제목의 책을 냈다. 그 때 한 인터뷰에서 “정치판이 살벌해진 것도 대변인 책임이 있다. 논평에 기지와 위트가 담겨야 정치판이 부드러워지고 국민의 마음이 편해진다”라고 말했다. 

그 문장 바로 뒤에 한 말도 인용한다. “완곡한 표현으로도 할 말은 다 할 수 있다. 그런 어휘를 찾기 위해 부단히 고뇌하고 다듬어야 한다. 대변인은 말로 사는 게 아니라 머리로 승부해야 한다. 논평 발표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해 달라. ‘이렇게까지 독한 말을 써도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완곡한 표현은 물론, 직설적 어투로 비판을 해도 상대가 들은 척하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대로 밀어붙이면 어찌해야 할까. 가능성은 없지만, 박희태 의장이, 이명박 대통령과 거대 여당에 맞선 야당 대변인이라면 어떻게 정국을 풀어낼까. 지금 야당 대변인들이 “아무리 비판해봐야 메아리가 없다. 입만 아프다”라고 허탈해 해서 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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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의 달인' 이만섭

최근 18대 후반기 국회의장으로 박희태 의원이 선출됐다. 또 5공화국 시절 국회의장을 지낸 채문식 씨가 작고했다. 국회의장 가운데 누구에게나 명망이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말하자면 ‘국회의장의 달인’으로 누가 있을까. 매우 드물지만 개중 한 명을 꼭 꼽으라면 이만섭 전 국회의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만섭 전 의장은 두 번의 의장 경력이 있다.

사실 우리나라 의정사에서 국회의장을 두 번 한 사람은 더 있다. 신익희, 이기붕, 이효상, 백두진, 정일권 의원이 그렇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정권에 걸쳐 국회의장을 한 경우는 이만섭 전 의장뿐이다. 김영삼 정부 때인 14대와, 김대중 정부 당시인 16대 의장이었다.

당연히 당적은 그때그때 달랐다. 14대 때에는 민주자유당 소속, 16대 때엔 새천년민주당이었다. 둘 다 당시엔 여당이었다. 이러다보니 이만섭 전 의장을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 중에는 “8선에 이르는 동안 권력의 양지만을 좇아 왔다”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억지 논리가 아니다. 박정희 정부 때에 자기 발로 공화당에 들어가 정치를 시작해, 5공 때에는 선명성 제로의 ‘무늬만’ 야당인 한국국민당을 이끌었고, 노태우 김영삼 정부 때엔 여당 민주자유당에 있다가,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여당 새정치국민회의로 갈아탔다.

반면 이만섭 전 의장은 ‘여당 속에 야당 역할’을 많이 했다고 자임한다. 박정희 정부 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통령 측근을 겨냥해 ‘교체’를 요구했던 일, 김영삼 김대중 정부 때, 대통령의 거듭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원칙대로 운영 한다’며 거부한 일이 그렇다. 하나하나 풀어보자.

혈기왕성 좌충우돌…민완기자 이만섭

이만섭 전 의장은 지금은 없어진 통신사에 입사했다가 1958년 <동아일보>에 스카우트됐다. 다니던 학교, 대구 대륜중학교에서는 농구, 수영선수, 연세대학교에서는 응원단장을 했던 이력으로 보아 젊었을 때 꽤 혈기왕성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기록도 있다. 3.15 부정선거가 터지고 이만섭 기자는 마산에 있었다. 때는 4월 11일. 바다에서 시체가 하나 떠올라서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됐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된 시신은 고 김주열 열사의 것이었다. 시민들은 시신을 수습해 마산 도립병원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보초 섰다. 경찰이 시신을 빼돌릴까봐 그랬다. 관찰자 입장이어야 할 기자 이만섭도 같이 보초 섰다고 한다. 

예상대로 경찰은 시신을 빼돌렸다. 그리고 김주열 열사의 고향인 전북 남원으로 말이다. 분한 이만섭 기자, 신문사 차량을 타고 추격했다. 그러다가 국도에서 경찰에게 제지당했다. 이 모든 상황을 기사로 써서 서울로 보냈다. 결국 이 문제는 4.19 혁명을 당긴 여러 도화선 가운데 하나가 됐다.

혈기왕성 에피소드 하나 더 해본다. 이만섭 전 의장은 국회의원 아닌 사람 신분으로는 최초로 국회 속기록에 이름을 올린 기록이 있다. 뭔가 만인의 박수를 자아내는 기념비적 족적을 남겨서일까? 아니다. 속기록에 남아있는 내용은 “이만섭 기자, 시끄러워요. 조용히 하세요”이었다. 

상황은 이랬다. 4·19 혁명 뒤 국회에서 자유당 부정선거 책임자들에 대한 구속동의안이 상정됐다. 그런데 부결됐다. 4·19혁명은 성공했지만 의석에선 여전히 자유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2층 기자석에서 부결되는 것을 지켜보다가 화가 난 이만섭 기자, ‘이 자유당 도둑놈들아∼’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국회부의장이 “조용히 하라” 이렇게 한마디 한 것이다.

석연치 않은 ‘박정희 대통령 만들기’ 투신

그리고 이듬해 박정희 장군이 이끌던 쿠데타 세력이 권력을 찬탈한다. 4.19 혁명의 의미가 어떻게 보면, 5.16 군사정변 때문에 퇴색됐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만섭 전 의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세운 공화당에 입당해서 정치를 하게 된다. 이런 아이러니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정권을 잡은 5.16 군부세력에게 이만섭 기자는 여전히 밉보였다. 사건 하나 소개한다. 5.16 이후 윤보선 대통령은 바로 하야하지 않았다. 한동안 ‘보위’에 있었다. 이만섭 기자와 5공 시절 MBC 사장을 하게 된 이진희 기자가 윤보선 대통령과 인터뷰를 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군부는 빨리 민간인에게 정권을 넘겨라”라고 말했다. 쿠데타 세력은 “나라를 바로 세우고 우리는 본래 자리로 돌아간다” 이렇게 공약한 바 있었지? “약속 지키라”는 말이었다. 직격탄이 아닐 수 없다. 군부는 발끈했다. 하지만 윤보선 대통령을 어떻게 처리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자 이만섭 이진희 기자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윤보선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말을 한 것처럼 조작했다”는 이유로.

그로부터 2년 뒤인, 1963년 이만섭 기자는 사실상 국가의 실권을 장악했던 박정희 국가재건회의 의장을 찾아간다. 그리고 “옆에서 돕고 싶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대통령 선거전에 뛰어들어 유세에 참여하는 형식으로 박정희 대통령 만들기에 매진했다. 언론인의 본분을 포기하고 특정 후보 캠프에 참여한 저널리스트를 폴리널리스트라고 하지? 이만섭 기자가 원조라면 원조이다.

왜 박정희 대통령 편에 섰을까.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이라는 신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한 대목이 있긴 하다. 납득하고 안 하고의 문제는 독자의 몫이다. 그렇게 해서 국회의원 전국구 배지를 단다. 이때 만 31살이었다. 참고로 지금 이효리 씨가 만 31살이다. 정말 그는 양지만 좇았을까? 그러나 그렇게 단정 짓기엔 이만섭 의원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한 이력도 있다.

가시밭길 ‘여당 속 야당’ 

1969년에 있었던 일이다.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이만섭 의원은 권력형 부정부패의 핵심인 이후락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해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두 번 해놓고 또 하려고 3선 개헌을 추진했을 때, ‘그러시면 안 된다’라며 쓴 소리를 했다. 

사실 ‘소신 발언’은 혼자 한 것은 아니고, 정구영 선생과 함께 했다. 정구영 선생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통성이 없던 군부세력이 삼고초려(三顧草廬)해 모신 분이다. 초대 공화당 총재였고, 1호 당원이었다. 인물 됨됨이도 훌륭했다. 돈 들고 찾아오는 사람을 빠짐없이 돌려보냈고, 친인척이 인사 청탁을 해도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분 기록을 보면 월남전 파병도 반대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월남의 호치민은 민족해방운동을 하고 있다. 이건 우리가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월남 파병 덕에 미국으로부터 더러운 돈 받느니, 깨끗하게 가난한 게 낫다." 지금 해도 논란이 될 만한 소신 발언을 거침없이 했다. 

두 사람, ‘뒤 탈’은 없었을까. 결국 정구영 선생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하루 동안 고생하고는 정계를 떠난다. 창창했던 이만섭 의원 역시 8년 동안 정치 활동을 차단당했다.

한편 이 같은 소신 발언을 두고 “이만섭이 김종필을 띄우려고 김형욱, 이후락을 공격한 거다” 이런 말도 없지 않았다. 이만섭 의원 본인은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의 ‘내통설’은 사실과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 속에서 둘은 우호적인 사이가 됐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이르러 훈훈한 우의에 냉기류가 덮쳤다. 김종필 씨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면서 당시 이만섭 총재가 몸담고 있던 한국국민당의 의원을 빼갔거든. 그러면서 국민당이 원내교섭단체 자격을 잃었고. 그 뒤부터는 이만섭 총재는 김종필 총재를 공격하는 선봉에 섰다. “JP가 1964년 한일협상 때 독도를 폭파하자고 했다”는 ‘폭로’로 김종필 총재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동네가 정계이다.

YS, DJ에게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선 그어

14대 입법부의 수장이 된 이만섭 의장, 그 꼬장꼬장한 성격은 김영삼 대통령을 불편하게 했다. 이런 갈등과 파열은 사실 긍정적인 면도 있다. 삼권이 분립된 국가에서 입법부가 내내 행정부에 끌려가는 게 온당하냐 이것이다. 1993년 연말로 가보자. 김영삼 대통령은 새해 예산안과 정당법, 안기부법, 통신비밀보호법을 통과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야당은 “우리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없다”며 으르렁댔다. 속 편하게 날치기로 처리하면 된다. 그러나 이만섭 의장, 청와대에다 “난 그런 거 안 합니다”라면서 선을 그었다.

김대중 정부 당시에도 그 성격 죽지 않았다. 2000년 16대 의장 시절 당시. 자민련의 의석은 원내교섭단체 구성 요건인 20석에 모자랐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이만섭 의장에게 “자민련도 원내교섭단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올려놓았는데 통과시켜주세요”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거부했다. 그 뒤 김대중 대통령은 두 번 다시 의장에게 아쉬운 소리 안 했다고 한다. 한편 그 일 이후에 벌어진 일은 희대의 코미디였다. 민주당이 자민련에다가 의원을 꿔준 사건이었다. 

이만섭 의장은 국회 바로서기를 위한 제도적 보완책도 마련했다. 국회의장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의장은 당적을 가질 수 없다’는 내용으로, 또, 두 번 다시 국회 파행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의장은 반드시 의장석에서만 사회를 봐야 한다’는 내용으로 국회법을 개정했다. 물론 그 뒤로 국회 파행이 그치지는 않았다. 국회 본회의장 진출입을 막기 위해 본회의장 앞 로비를 여당이 또 야당이 점거하는 식의 변태적 파행만 줄줄이 이어졌을 뿐이다.

국회의장이 바로 서야 국회가 바로 서

‘아닌 건 아닙니다’라고 했던 국회의장, 우리 의정사에서 찾기 드물다. 그렇기 때문이 2004년 이미 정계은퇴를 선언한 이후에도 때마다 한마디씩 던지는 이만섭 전 의장의 훈수는 언론의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소신 의장’의 존재가치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 가운데는 ‘빛나는 도덕성’도 있다. 8선을 하는 과정에서 돈과 관련한 스캔들 하나 남기지 않았다. 남에게 알리지 않고 자녀들의 결혼을 시킨 사례는 청렴성의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전진해야 합니다"던 이 국회의장, 한 달 뒤 정계에서 퇴진한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결의안이 통과되던 2004년 3월 어느날 국회 풍경 ⓒ 오마이뉴스 이종호

여담이다만, 역대 국회의장 중에 <동아일보> 출신이 참 많다. 이만섭 의장 외에도 곽상훈 김원기 임채정 김형오 의장해서 5명이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란 점이다. 전체의 25%를 한 언론사가 배출한 셈이다. 후배 기자이면서 후배 의장이었던 김형오 전 의장, 청와대의 입법 청부와 파행 없는 국회 운영 사이에서 꽤 많은 고민과 좌절을 했다. 박희태 현 의장도 같은 전철을 밟게 될까. 오늘의 결론은 이거다. “국회의장이 바로서야 국회가 바로 선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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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6.25

방송에서는 연신 “우리 군이 북한군을 격퇴하고 있다. 아니 이미 38선을 넘어 해주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라고 전한다. 그러나 그런 북한군의 전투기는 서울시 상공을 휘젓고 다니고 있고, 대포 소리가 외곽으로부터 점점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서울시민의 불안은 커져만 갔다. 이런 와중에 1950년 6월 27일 밤 9시, 중앙방송(KBS)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울려 퍼진다. 생중계였다.

“동포여러분”으로 시작한 이승만 대통령, “의정부를 탈환했다. 계속 진격하고 있다. 모든 것이 잘 돼가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라”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불과 몇 시간 뒤에, 의정부는 물론, 창동, 미아리, 길음교, 남산까지 수도 서울의 전역이 적의 수중에 힘없이 넘어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방송한 장소는 서울이 아니라 대전이었다.

대국민 사기 방송의 원조, 이승만

사건 개요는 이렇다. KBS대전방송국(현 총국) 유병은 방송과장은 6월 27일 저녁 7시 반에 갑자기 청사로 들어온 초대형 고급 승용차에 실려 간다. 당도한 곳은 충남지사 관사.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다. ‘아니, 이 박사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놀라기가 무섭게 권총 든 비서관은 문을 잠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떨고 있는 KBS대전 방송과장에게 6가지 지침을 내렸다.

1.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2.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3. 오늘 밤 9시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서 전국에 중계하라.
4. 내가 방송한 것을 서울에서는 녹음해서 밤에 여러 번 재방송하라.
5. 누가 묻더라도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6. 사전에 대통령 연설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해서는 안 된다.

방송과장은 우체국, 대전방송국, 중앙방송국(서울 본사)에 연락하고는 90여분 만에 밤 9시 생방송을 성사시켰다. 국민은 이승만 대통령이 중앙청 또는 경무대에서 방송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방송을 듣고 안심했던 국민은 낭패를 보게 됐다. 눈 뜨고 보니 서울이 온통 인민군의 소굴이 된 것이다. 방송을 듣고도 ‘무슨 소리냐, 국군이 연일 후퇴하고 있는데’ 이러며 늦게나마 남쪽으로 발길을 이어갔던 사람들, 이 사람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방송 후 몇 시간 뒤인 28일 새벽 2시, 북새통을 이루던 한강다리가 폭파됐기 때문이다. 그 순간 다리를 건너고 있던 800여 시민과 장병들을 비명에 보내버린 원흉은 국군이었다. 적의 남하를 막기 위한 거라고는 하나 이 순간까지도 대한민국 정부에게 국민은 속여도 되고 죽여도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은 언제 ‘도망’했을까?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북한 인민군의 일제 공격이 시작된다. 전황은 갈수록 불리하게 전개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머무는 맥아더 장군에게 도움을 구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도 S. O. S 신호를 날렸다. 서울 함락이 시간문제라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각료들은 27일 화요일 새벽 2시, 비밀리에 특별열차를 탄다. 수원을 거쳐 대전에 이른 이승만 대통령 일행, 그날 밤 9시 방송을 하게 된다. 이런 행정부의 대탈출을 국회의원들도 잘 몰랐던 모양이다. 210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설마 설마’하며 서울을 지키던 62명 중 8명은 피살되고 27명이 납북되거나 실종됐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군에 쫓겨 한양을 떠나던 조선시대 선조의 피난 행차가 생각난다. 당시 성난 백성들은 형조와 장예원(掌隸院, 노비문서를 보관하는 곳)에 불을 질렀다. 형조가 관할하던 옥에서 죄수들이 쏟아져 나왔고, 장예원이 소장하던 노비문서는 잿더미가 됐다.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내 팽개친 군주에 대한 반란이었다. 선조의 수난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행차 중에 돌을 맞았고, 원성을 샀던 관리들은 몰매 맞았으며, 심지어 선조의 왕자들을 왜놈에게 넘겨주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사건만으로도 국부의 권위는 물론,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마저 상실했다.

국민은 속여도 죽여도 되는 존재?

더 분노할 사안은, 국민으로 하여금 피난을 지연시켜서 더 많은 희생자를 유발했고, 서울시민을 공산치하에 넘기도록 원인 제공을 한 6.27 사기방송에 대해 정부 차원의 사과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한강 인도교 폭발은 또 어떤가. 군은 책임을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몽땅 뒤집어 씌웠다. 훗날 알려지게 된 사실이지만, 이 일은 육군 참모총장이 시킨 것이었다. 상부의 지시대로 한 죄로 목숨을 내놓게 된 것이다. 정직하지도 당당하지도 못한 정부였다.

‘한미 두 나라의 북한 침략 유도설’이 한 때 힘을 얻었던 배경도 당시 한국 정부의 어이없는 안보 태세에 있었다. 당시는 미군이 철수한 상태였다. 우리에겐 단 한 대도 없었던 전차 242대를 북한은 몰고 내려왔다고 한다. 뭘 믿고 그렇게 유유자적했던 것일까. 군의 대비 태세는 더 기막혔다. 전쟁 전날인 6월 24일, 육군본부 정보국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북한의 병력이 38선 근처로 집결중이라는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없이 군 수뇌부는 장병들에게 주말 휴가를 줬고, 일상적으로 행동했단다. 밤에는 육군본부에서 전방 사단장까지 집합해 새벽 2시까지 ‘뒤풀이’를 벌이기도 했다고 하니 말 다한 것 아닌가. 얼마나 화가 났던지 당시 이형근 2사단장은 “군 수뇌부에 적과 내통하는 사람들이 있다”라며 반발하기도 했다.


                                          국민방위군에 소집된 이들

이승만 정부의 적폐(積弊)는 이걸로 끝이 아니다. 국민방위군사건을 아는가. 1.4 후퇴 때 일이다. 당시 제2국민병 말하자면 예비군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을 이끌던 고급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해 착복했다. 이 때문에 제 때 보급 받지 못해 굶어서, 얼어서 죽은 사람만 9만 명이었다. 거창민간인학살사건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거창은 지리산과 가깝지? 거창 신원면 주민들 700명이 지리산 공비와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학살당했다. 아무리 전시라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외면할 민심이 아니었다. 때마침 이승만 대통령의 임기 1951년 11월 30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권교체는 명약관화했다.

그러나 권좌를 새 주인이 차지했던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발발 후 10년 동안 권좌를 유지했다. ‘전쟁 때 장수를 바꾸면 안 된다’는 정서와, 유엔군을 불러들이고 북한까지 진격한 점을 토대로 쌓은 ‘국난 수습의 공로’에 기댄 측면이 있다. 그러나 본질은 따로 있었다.

암울한 재집권 전망...'정치공작'으로 한방에!

‘정치 공작’을 시도한 것이다. 자기가 대통령되기 좋은 구조로 헌법을 바꾸려 했던 것이다. 야당은 물론 여당도 반대했다. 그래서 개헌안은 부결됐다. 여기에 굴할 이승만 대통령이었을까. 아니다. 훗날 4.19 혁명으로 무너지게 되는 자유당을 창당하고, 어용단체를 동원하고, 정치깡패 집단까지 앞장 세워 비판세력을 물리적 심리적으로 겁박했다. 공권력은 쉬고 있었느냐. 그럴 리가. 경찰은 반대파 의원들을 속속 체포했다. 압권은 또 다시 내놓은 개헌안이 부결되지 않도록 야당 국회의원 50여 명을 태운 버스를 통째로 강제로 헌병대가 끌고 갔던 일이다. 물론 잡아가는데 있어 명목이 없지 않았다. “이 의원들이 국제 공산당과 내통했다”는 거짓 혐의였다.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또 한 번 대통령을 하게 됐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 재건된 이 씨 왕조 시대의 군주 이승만 대통령. 그의 말기엔 온통 아첨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여기서 이익흥 씨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일본 경찰 출신의 이익흥 당시 내무부장관은 1956년 어느 날, 광나루로 낚시하러 간 이승만 대통령을 수행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방귀를 뀌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이익흥 장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한마디 한 것이다. 낯 뜨거운 아부가 아닐 수 없다. 여담인데, 4.19 혁명이 나고 이익흥 씨가 야인이 됐을 때, MBC라디오 PD가 이 사람의 증언을 듣고 싶어했다. 특히 이익흥 씨 입으로 하는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말을 따 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걸 이익흥 씨가 해주겠나.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하지만 PD는 기지를 발휘해 뜻을 이루었다. 이익흥 씨에게 “장관님, 많은 사람들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말을 마치 장관님이 한 것인 양 알고 있는데, 아니지요?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주십시오” 이렇게 말한 것이다. 모처럼 자기편을 만났다고 판단한 이익흥 씨, 한참 신나게 이야기하다가 “그래서 내가 그랬지.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말을 내가 언제 했냐고!’”라고 했다. 말려든 것이다. PD는 쾌재를 부르고는 그 녹음 커트를 에코까지 넣어서 “보도특집, 그때 그 사람,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편”라는 타이틀을 만든 것이다. 이익흥 씨는 노발대발했지만, 이미 전파가 공중에 흩어진 후였다. 

이렇게 권모술수로 독재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한 채 아첨꾼에 둘러싸여 견제다운 견제를 받지 못했던 이승만 정부. 부정선거라는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다가 결국 국민에 의해 축출된다. 민심은 하늘이다.

현 정부는 국가 안보를 책임질 능력과 권위가 있나

두 번 다시 이 나라에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데 과연 이견이 있을까. 그러나 실천 방안을 두고는 편이 갈린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감히 도발할 생각을 못하도록 우리 스스로 군사 강성대국화 돼야 한다는 쪽과, 두루두루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화해 공존의 기틀을 세워야 한다는 쪽으로 말이다. 그러나 국가는, 정부는, 어떤 기조, 어떤 상황이건 유사시에 대비해야 한다. 천안함 사건이 북한 소행이라면 한국 전쟁 당시 무방비로 당했던 상황과 무엇이 다를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는 위기, 이 위기를 방지할 능력과 권위가 현 정부에게 있을까.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새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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