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여, 십자가탑에 와이파이를 설치하자



댓글 속에 지혜가 있네요. 전폭적으로 동의합니다. 교회가 이웃을 위해 십자가탑에다 와이파이 단말기를 단다면,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적잖게 개선되리라 믿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전국적으로 교회가 5만개에 이릅니다. 모든 교회마다 그런 서비스를 한다면 교회는 대중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줄 수 있습니다. 무선 인터넷을 하기 위한 목적이겠지만, 젊은이들이 교회에 다가가기를 습관화하지 않겠습니까. 요즘은 비용 지불하면서도 그런 광고효과를 노리는 곳이 많습니다. 또 교회 위치에 따라서는 통신사가 협조적으로 나올 공산도 크기에 비용 추가지불  없이도 그런 실익을 노릴 수 있습니다. 신도건 비신도건 덕과 득을 끼치는 교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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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향 설교를 하자

한국교회 내 악한 목사, 나쁜 교회의 문제점 중 핵심은 강단 발언권 남용이다. 허무맹랑한 색깔론과 불법적인 선거개입 등 말이 똥이 될 수 있음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이들, 한 두 명이 아니다. 이런 목사들의 입을 막을 길은 현실적으로 없다. 그런 설교가 듣기 좋은 초록 관계인 동색의 교인들, 불편하기 짝이 없으나 입 다물 수밖에 없는 침묵하는 교인들 때문이다. 자율적 변화를 기대하기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강단 발언권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다. 이를 오용하는 자,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경우다. 엄한 추궁을 피하기 힘들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런 나의 언급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신념과 양심에 따라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강변이 맞설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논거를 제시하며 설득력을 내재시켜야 마땅하다. 그러나 문제시 되는 목사의 거의 대부분은 조중동 등에서 몇 문단 인용하는 게 전부다.


방법은 없을까. 이건 다른 교회, 특히 생각 바르고 통찰력이 있는 목회자들이 나설 부분이라고 본다. 설교 후 일정 시간에 질문 또는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다. 이른바 쌍방향 설교를 하자는 것이다. 비판과 반박일 수 있겠으나, 지지 의사 표시와 (목사 설교의 설득력을 강화시킬) 또 다른 논거 제시의 장이 될 수 있다. 이건 하나님 아래 모두가 동등하며, 교회가 곧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신학적 사리와 연결되는 부분이다.


또한 이는 강단 혁명에 해당한다. 수 십 년 전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우려먹는 목사는 사라질 것이다. 논리적 빈틈을 메우기 위해 설교 전 공부하고 또 공부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2000만 개 이상의 스마트폰이 팔려나간 세상이다. 누구나 설교를 들으며 목사가 바른 말을 하는지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지 엄지 손놀림 몇 번으로 감별할 수 있다.


아울러 식견이 상당 수준에 이른 신자 대중의 눈높이를 맞는 것이다. 대학 진학률 80% 시대를 언급할 필요가 없다. 각종 매스미디어 특히 SNS 혁명 등의 영향으로 현대인의 사고와 인식의 틀은 누구로부터 계몽 받아야 할 처지가 아니게 됐다. 따라서 시국에 관한 수구 보수적 견지를 일방적 편향적으로 전파할 때에 교인의 빈축만 살 것이다. 이미 교인은 목사가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는지 조차 간파하는 상황이다. 현대 설교는 논리적 감성적 설득이어야지 하향식 훈계이어서는 안 된다.


결국 어떤 견해든 소통 가능한 목회자가 자기 설교에서부터 대화식 메시지 전달을 도입하는 것이다. 그것이 확산되면, 자연스럽게 교회는 신구 양 갈래로 나뉠 것이다. 이런 프레임이 형성되면 ‘낡은 이미지’ 낙인이 싫은 교회 또 목회자까지 ‘대세’를 무시 못 할 것이다.


영원한 독재, 지속적 일방성을 원하는 목회자들은, 타임머신 타고 수 십 년 전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21세기 목회 현장에서 온존할 수 없다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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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문화를 없애자

내 아버지는 목사다. 나 자신은 집사며 태어나 지금껏 공교회를 등져보지 않았다. 사실 목사 아들이 교회 흔들기 방안을 제시하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으로는 부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강조하건데 이는 못된 교회에 속한 교인을 위한 이야기다. 상식에 준거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 정상적 교회와는 무관하며 또한 적용될 가능성은 없다. 이를 분명히 한다. 이번호에는 지난 시간 언급한 ‘봉헌금 직거래’에 뒤 이은 두 번째 이야기다.


경조비가 없었던 시절에는 어땠을까. 기록에 따르면 쌀과 보리며 옷감 같은 현물을 들고 와 십시일반으로 도왔다고 한다. 그도 저도 없어 몸으로 대소사를 도와주는 일도 허다했다. 이는 모두 상부상조 정신이자 품앗이였다. 이와 관련해 청나라 사상가 캉유웨이(康有爲)는 ‘조선인이 갖고 있는 뜨거운 마음의 표시’라 했고 일본의 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인의 주고받는 인심이 곧 그들의 친선과 국력이 되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물론 과거지사다. 지난날 직접 일손으로 거들어 주던 풍습은 이제 봉투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경조비 관련 최신 통계는 2007년 통계청 자료인데, 연간으로 환산하면 가구당 지출은 46만7000원에 달한단다. 당시 우리나라의 가구 수가 1642만 가구였다는 점에 비춰 보면 무려 7조6681억 원이 경조비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에게 준만큼 돌려받을까. 또 다른 통계에 따르면 30대에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매년 300만~400만원 그러니까 총액 1억5천만~2억 원을 경조사비로 지출하지만 돌려받을 수 있는 액수는 고작 몇 천만 원 수준을 넘어서기 힘든 실정이라고 한다. 교인이라면 교회라는 또 다른 공동체가 형성돼 있는 만큼 지출 규모가 평균보다 클 수밖에 없다. 본전 생각을 안 할 수 없게 한다.


한국의 대형교회의 네트워킹은 가히 부조문화와 직결된다. 받은 만큼 주고, 준만큼 돌려받는 구조 속에 얽매다보면 이를 형성해준 교회가 비리와 부정으로 몸살을 앓아도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없고 ‘김 집사 아들 결혼식 때 내놓은 봉투 속 5만 원’만 남는다. ‘내가 만약 이 교회를 떠나면 김 집사에게서 회수해야 할 5만 원을 포기해야 한다’는 심리가 교인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다.


착한 교회를 만들기 위한 좋은 방법 두 번째,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다. 교인끼리 금전적 부조 안 하기다. 결혼식에는 축가, 장례식에는 조의금 접수 등 가능한 재능 기부를 통해 상대의 애경사에 한 몫을 담당하는 것, 회수(回收) 여부에 대해 괘념치 않을 선물을 나누는 것 등 따뜻한 정으로 함께 하는 일은 얼마든지 권장할 일이다. 그러나 돈은 나누지 말자는 것이다.


본질은 이거다. 교회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뜨는 구조가 돼야 한다. 지난 호에도 이야기했지만 부패교회 타락목사가 정신 차릴 수 있는 유일한 변수는 교인 수 및 헌금액수 규모의 변동성이다. 교회와 목사가 창피하면 교인수와 헌금액수가 줄어야 한다. 그러면 교인 이동의 유연성이 담보된다. 내가 봤을 때 부조 문화의 폐기는 이런 변화를 부를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원칙적으로 교회내 교인과 교인 사이에 금전 거래는 삼가야 옳다. 성과 속을 가르자며 엉뚱한 것만 금기하고 금전의 문제에 대해서 방치하는 태도는 온당치 않다. 게다가 물질만능 사회 속에서는 더욱.


나쁜 교회 이야기라고 했지만, 뜻있는 목사라면 목회적 결단을 해야 할 일이다. 부조 문화를 공식적으로 금기시한다면 그 교회의 거룩함은 더해질 것이고, 아울러 목회자는 건강한 목회 정신을 날마다 새롭게 다질 수 있을 것이다. 교회 내 예식 때에 부조금 받지 않기 나아가 교회가 일정한 기간 출석한 교인을 상대로 예식비용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비용 발생 요인을 줄이는 길도 함께 모색해봤으면 한다.


희생이 없다면, 추구하는 거룩함은 공허한 겉치레에 불과하지 않을까. 'Free Money 지대'. 성결한 교회의 기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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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 목사 교회, 헌금 딴 데다 내기

교회 내부는 물론 사회 각처에서 한국교회의 갱신을 요구한다. 과거엔 눈치 보느라 주저했던 언론의 목사 비판도 이젠 일상화됐다. ‘조인트’를 매개로 장로 대통령에게 완벽하게 장악된 한 공영방송 조차 모 대형교회 원로목사 일가의 교회 돈 사적 유용 의혹을 거침없이 제기한 점이 상징적이다. 그럼에도 해당 원로목사는 꿈쩍 안 한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목사의 도덕성 수준을 세상의 기대치 근처라도 이르게 하자는 것이다. 목회자로서 대사회적 관점을 어떻게 해야 한다, 약자 등 사회구조적 취약계층 옹호를 위해 어떤 관념을 가져야 한다 이런 거 다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할 만큼 상황은 너무 심각하다. 개교회가 교단 혹은 교단연합체를 능가할 위력이 있음에 구조적 문제가 있다. 만약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서 그 대형교회에게 해당 원로목사를 치리(즉 징계)하라는 요구를 소속 교단과 이 교단이 속한 교단연합체가 엄명할 수 있는 구조인가. 현재로선 드러난 비위에 대해 목사 스스로 각성하고 참회하는 길 밖에는 없다.


요 몇 달 동안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항의 서한을 보내고, 찾아가 권면하고, 안 되면 밖에서 피켓을 들고 그래도 안 되면 고소 고발을 하는 기존의 방식. (소중한 노력이나) 다 방법이 아님을 우리는 확인했다. 어디 말을 들어야지. 골몰한 끝에 찾아낸 단초가 있다. 치사하지만 ‘돈’이다. 사실 문제 많은 목사들의 가장 약하고 악한 고리가 ‘돈’이다. 이런 점은 목사들이 모이기만 하면 교인 수, 헌금액수 갖고 으스대거나 위축되는 현실에서 착안했다.


어떤 식이냐. 본인이 생각하기에 다니는 교회가 썩었다 싶으면 매주 봉헌할 돈을 뜻있는 선교, 사회단체 아니면 교회가 들어서기 힘든 곳 또는 신앙의 자유가 억압된 곳에서 억척스럽게 사역하는 시골교회 또는 선교사에 각각 보내는 것이다. 이것이 조직적으로 이뤄진다면 성과는 상당할 것이다. 좀 더 당당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 헌금봉투에다 ‘교회에 내던 것을 이쪽에다 했다’는 뜻의 기부 영수증을 넣고 봉헌함에 투입하는 것은 또 어떨까.


문제 목사는 놀랄 것이다. 교인 수는 그대로인데, 헌금액수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면. 그렇다고 당장 진지한 성찰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하는 교인이 누구이고, 선동하는 수괴도 찾아낼 것이다. 이는 독재자가 저항하는 시민을 배제하고 고립시켜 고사시키는 방식과 동일하다. 그러면 저절로 역풍이 일어나면서 목사를 위시한 왕당파는 ‘더 긴요한 곳에 봉헌한 것조차 문제 삼는, 돈에 환장한 쪼잔이’로 몰리게 되고 결국 고립될 것이다. 이러면 세기적 철면피가 아니고서야 자아성찰을 안 할 수 없게 되며, 제 멋대로의 권력자 행세도 삼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교회에 안 나가는 방법이 사실 최선이다. 교인 수, 봉헌금 액수가 한꺼번에 줄어든다면 목사에게는 공황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러나 쉬운 방법은 아니다. 왜냐. 부조문화 때문이다. 우리 한국교회의 부당한 세력 유지는 이에서 비롯됐다. “내가 김 집사 아들 결혼할 때 5만 원, 박 권사 모친 별세했을 때 10만 원 했는데, 내 딸 결혼할 때 그리고 나 죽을 때에 회수해야지” 이런 심리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속감은 유지하되 또 봉헌의 정신은 살리되 목사의 권익과 위세를 분리하는 방식의 답을 찾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다.


사실 이를 행할 수 있는 세대는 40대 이하라고 본다. ‘저 친구는 나보다 신앙생활 늦게 했는데 벌써 안수집사가 되다니’하는 식의, 신분처럼 오도된 직분욕(慾)으로부터 자유롭고, 부조문화에 얽매이지 않는 건강함이 실은 젊음의 특권 아닌가. 이를 최대한 활용하자는 측면이다. 이로써 교회의 대사회적 신인도 추락에 따른 젊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감 살리기는 빛을 드러낼 것이다.


그릇된 목사에 대해 일침을 놓는 용도만이 아니다. 국세청 통계는 우리나라의 개인 기부금 중 80%는 종교적 헌금이라 적시한다. 영국은 교회 등 종교기관에 기부하는 돈이 개인 기부금 중 13%에 불과하고 미국도 30% 정도에 그친다고 한다. (물론 많은 교회가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부를 실천한다만) 교인 개개인과 도움을 요청하는 쪽의 ‘직거래’가 보편화된다면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의 폭과 결실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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